남는 사람
"내가 죽으면 사라지는 게 아니야. 죽는 거지."
"죽음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야. 산 자 — 아니, 살아남은 자의 것이지."
11월 둘째 주의 어느 저녁, 현철이 집에 들어섰을 때 시계는 아홉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거실 천정등은 켜져 있지 않았고, 식탁 위에만 작은 갓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코트를 벗기 전에 그는 복도 끝의 지수 방 문 앞에 잠시 섰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취침등의 흐릿한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문을 한 뼘 더 밀어 열었다.
지수가 자고 있었다. 등을 보이고 옆으로. 한 손이 자기 입 가까이에 올라가 있었고, 다른 손은 작은 토끼 인형의 한쪽 귀를 쥐고 있었다. 한 살 반의 호흡이 일정하게 들렸다. 현철은 자기도 모르게 지수의 호흡에 맞춰 숫자를 세고 있었다.
문을 원래 열려 있었던 것만큼 닫았다. 그러고 거실 쪽으로 걸어 나왔다.
거실로 걸어 나오는 길에 그가 책장 위의 작은 액자를 한 번 보았다. 수아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식탁 갓등의 빛이 액자 가장자리에 어슴푸레 닿아 있었고, 액자 안쪽의 얼굴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수아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종이 가장자리에 손가락 끝을 가만히 올려놓고 있었다.
"왔어." 수아가 말했다.
그는 식탁 위의 어지러운 문서들을 힐끗 봤다. 글자들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한 페이지의 가장자리에 익숙한 단어가 보였다. Glycolysis. 그 옆에 펼쳐진 다른 종이에는 새의 안구 단면이 그려져 있었다. 빗살돌기가 안구 안쪽으로 돌출된 그림. 또 그 옆에는 Anaerobic respiration in non-microbial eukaryotes라는 제목의 리뷰 페이퍼 출력본.
그가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걸었다. 그 동작이 평소보다 약간 느렸다.
"늦었네."
"미안해."
"지수 오늘 잘 놀았어?"
"응. 잘 놀았어. 지금은 토끼 안고 자."
"오늘 낮에 한참을 안 자려고 했어. 늦게야 겨우 잠들었어."
"……그랬구나."
"앉아봐."
그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갓등의 빛은 두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만드는 종류의 빛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 글자를 분명히 보이게 하는 종류의 빛이었다.
"차 끓여놨어. 가져올까?"
"내가 가져올게."
"앉아 있어." 수아가 일어서다 말고 그를 보았다. "당신 오늘 좀 앉아 있어." 뭔가 해야 할 말이 있을 때 하던 말이었다.
수아가 부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쪽 손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짚으며. 그가 일어서지 않고 그 걸음을 끝까지 보았다. 수아는 머그 두 개에 차를 따라 돌아왔다. 한 잔을 그의 앞에 놓고, 다른 한 잔을 자기 앞에 놓았다. 수아는 두 손으로 찻잔을 그러쥐고 한 모금 마셨다. 현철은 그저 찻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늘은 어땠어."
"…그저 그래."
"4년째 그저 그래."
"4년째 그저 그래."
수아가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식탁 위의 종이 한 장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요즘 이런걸 읽고 있었어."
수아가 종이를 그가 볼 수 있게 살짝 돌려놓았다. Pecten oculi와 망막의 만성 무산소 적응. 그 옆 종이는 척추동물 망막 세포의 ATP 수율 — 호기성/혐기성 비교 분석. 그 옆은 영구 무산소 환경에 적응한 진핵세포의 사례 보고.
그는 한참 동안 종이를 보았다. 글자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 이유를 그는 알았다.
"이거." 그가 말했다.
"응."
"당신이 이걸 어떻게."
"당신 책상 위에 있던 거 복사했어. 일주일 전쯤."
"……."
"가끔 당신 자고 있을 때 가방을 한 번씩 봐. 뭐 챙겨놓을 게 있나 해서. 미안해."
"……."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안 미안해. 당신은 한 달째 이 분야 논문만 읽고 있어. T-오가넬 미팅 자료보다 이게 더 많아."
그가 천천히 차에 손을 댔다. 머그가 따뜻했다. 그러나 그 따뜻함이 그의 손바닥에 닿아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수아야."
"응."
"이건 그냥."
"그냥 뭐?"
"읽어두는 거야. 비교군 삼아서."
"무슨 비교군." 수아가 그를 보았다. 갓등의 빛이 수아의 한쪽 얼굴만 밝게 만들고 있었다. "T-오가넬은 미토콘드리아 보완 시스템이야. 여기 이 논문들은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는 시스템들이야. 비교군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이야."
"……."
"당신의 연구가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가 시선을 차로 내렸다. 갈색 표면에 식탁의 갓등이 작게 비쳐 있었다. 그 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기 손이 떨리고 있는 줄을 그제야 알았다.
"현철아."
"응."
"당신, 자기 자신한테도 아직 다 말 안 한 게 있어."
그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나 심리학과 졸업한 지 오래됐지만 다 보여."
"……."
"지난 4년 동안 당신을 봐왔어. 머릿속에 다른 길 하나가 작년부터 어른거리고 있어. 그땐 분명하지 않았어. 자기 자신도 그게 뭔지 몰랐던 거 같아. 그런데 지난 두 달 사이에 그 길이 당신 안에서 모양을 갖춰가는 게 보여."
"수아야."
"말해봐. 그게 뭐야?"
그가 답하지 않았다.
수아는 재촉하지 않았다. 식탁 위의 종이 한 장을 다시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새의 안구 단면도. 그 종이를 평평하게 펴고는 손바닥을 그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당신이 말 안 하면 내가 말할게."
"…."
"산소가 없는 대사를 할 수 없을까.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는 세포를 만들 수 있을까. 새의 망막처럼."
머그를 잡고 있던 현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당신 머릿속에 있는 가설이지."
그가 눈을 들었다. 수아는 그를 보고 있었다. 분노한 얼굴이 아니었다. 슬픈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본인이 본 것을 본인 자리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학부 시절 그가 처음 좋아하게 된 얼굴이기도 했다. 그 얼굴 앞에서 그는 어떤 종류의 거짓말도 잘 한 적이 없었다.
"……그래."
"그래."
수아가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줘서."
"수아야. 이건 가설이야. 한 줄짜리 가설.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한 줄짜리 가설이라도 당신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야."
"……."
"당신은 한 달째 이걸 들고 다녔어. 자기 자신한테도 못 말하고. 나한테도 못 말하고. 그게 당신한테 어떤 무게인지 나는 알아. 당신 잘 못 자잖아. 식탁에 앉으면 처음 5분은 멍해 있고. 지난주에 운전하다 잘못 든 길 한 번 있었다고 했지.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당신 기억 안 나잖아. 당신 한 달 내내 머릿속이 다른 데 가 있어."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그래도, 가설일 뿐이야. 4년째 다른 길이 안 보여서, 그냥 - 한 번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는 거야."
"현철아."
"응."
"그게 치료라고 생각해?"
그가 멈췄다.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는 세포를 만드는 거." 수아가 천천히 말했다. "그게 치료야?"
"……."
"치료는 망가진 거 고쳐서 원래대로 돌려놓는 거잖아.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는 세포를 만드는 건, 망가진 미토콘드리아를 가진 사람을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는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거잖아. 그건 치료가 아니야. 그건 바꾸는 거야."
"……."
"당신이 만들겠다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으면 당신은 없어."
수아가 그를 보았다.
"내가 죽으면 내가 죽는 거지. 사라지는 게 아니야."
"수아야, 그게 같은 말이야."
"같은 말 아니야."
수아가 머그를 두 손으로 감쌌다. 손이 부어 있었다.
"죽는다는 건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살다가 그 자리에서 끝나는 거야.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워두고 그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야. 당신 지금 두 가지를 같은 거라고 말하고 있어."
"수아야, 당신 30대야. 우리 부부 30대야. 모든 사람이 30대에 죽지는 않아."
"누구의 30대는 그래."
"…."
"우리 엄마는 32살이었어."
수아의 시선이 잠시 식탁을 떠나 책장 위의 액자 쪽에 닿았다. 그쪽은 갓등의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어둠이었고,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아는 거기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식탁 위가 잠시 조용해졌다. 갓등 안의 가는 떨림 같은 소리만 들렸다. 라디에이터의 소리도 줄었다.
수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는 미토콘드리아가 무너지는 몸을 가진 사람으로 살다가, 그 몸 안에서 돌아가셨어. 그 몸이 엄마였어. 만약에 엄마가 다른 시스템을 끼워 넣은 다른 몸으로 옮겨 가서 살아남았으면, 그건 엄마가 아니었어. 적어도 나는 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을 거야."
"수아야."
"내 안에는 엄마의 미토콘드리아가 들어 있어. 모계 유전이야. 엄마가 나한테 주신 거지. 30대 초에 돌아가신 그 시스템이 그대로 내 세포에 있어. 그 시스템이 망가지는 게 내 병이 아니야."
수아가 그를 정확히 보았다.
"망가지는 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게 나야."
그가 한참 동안 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문장이 동시에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의학 논문의 문장도 있었고, 임상에서 배운 환자 분류의 언어도 있었고, 수아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자기가 수아에게 했던 말 — 무어라고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어머니가 평안히 가셨다'는 종류의 말이었던 — 그 말도 있었다. 그 모든 문장이 지금 식탁 위에서 한꺼번에 부정당하고 있었다.
"수아야."
"응."
"당신 논리대로면, 의학은 어디서부터 의학이 아니야?"
"……."
"심장 이식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야, 아니야? 인공 신장 단 사람은? 항암 치료로 골수가 바뀐 사람은? 어디서부터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니게 돼?"
수아가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답했다.
"심장 이식은 펌프를 바꾸는 거야. 인공 신장은 여과기를 바꾸는 거야. 항암 치료는 망가진 세포를 죽이고 정상 줄기세포가 다시 그 사람 시스템을 채우는 거야. 전부 그 사람의 원래 설계 안에서, 부품을 바꾸는 거야."
"……."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는 몸은 그 사람의 원래 설계가 아니야. 다른 설계야.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 적이 없는 설계야."
"수아야, 그건 너무 — "
"종교적인 얘기 같지." 수아가 잠시 웃었다. 정말 짧게. "근데 종교 얘기는 아니야. 심리학 얘기야. 사람이 자기를 자기라고 인식하는 건 여러 가지 것들의 결합이야. 통증의 한도, 피곤함의 리듬, 숨이 차는 지점, 발이 시린 감각 — 그게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일부야. 그걸 다른 시스템으로 갈아끼우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기억은 그 시스템 위에서 다르게 작동해. 같은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이 돼."
수아가 머그를 들고 한모금 마셨다. 식탁 위에 다시 내려놓는 동작이 평소보다 한 박자 길었다.
"한 가지 더 짚어둘까."
그가 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만들겠다는 그 시스템. 미토콘드리아를 안 쓰고 당분해로만 사는 세포. 이미 자연에 있어. 인간 몸 안에 있어."
그가 입을 열려다 닫았다.
"암이야."
"……."
"와버그가 1920년대에 발표했어. 암 세포는 산소가 충분한데도 일부러 호기성 대사를 끄고 당분해로 가. 미토콘드리아가 멀쩡한데도. 그래야 미친 듯이 자라거든. 와버그 효과."
"…수아야."
"아마 당신도 이미 알겠지."
"……알아."
"근데 당신, 지난 한 달 동안 이 논문들을 읽으면서 와버그를 머릿속에서 한 번도 꺼내지 않으려고 했지. 그렇지."
"……."
"꺼내는 순간 당신 가설이 — 환자를 살리는 게 아니라, 환자의 세포를 종양처럼 살게 만드는 게 되니까."
"수아야, 그건 비유야. 정확히 같지는 않아 — "
"정확히 같지는 않아. 알아. 분열의 폭주는 따로 통제하겠지. 그래도 대사 패턴은 똑같아. 그리고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게 대사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
"당신이 살리겠다는 사람은, 대사적으로는 종양처럼 사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이미 우리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
그가 차에 다시 손을 댔다. 머그는 이미 식어 있었다.
"수아야."
"응."
"그러면..."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지수는?"
수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아주 미세하게. 한 손이 식탁 가장자리를 한 번 짚었다.
"지수는 아직 안 아파." 그가 말했다. "발병 전에 손을 쓸 수 있어. 미토콘드리아가 무너지기 전에, 무너지지 않는 다른 시스템을 미리 끼워 넣을 수 있어. 당신 어머니가 30대 초에 돌아가셨고 당신이 30대고 — 지수까지 그 카운트로 가게 두지 않을 수 있어. 지수는 안 아파도 돼."
수아가 머그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현철아."
"응."
"방금 지수 방에 들렀지."
"…응."
"잠든 거 봤지."
"……."
"지금 옆방에서 토끼를 안고 자고 있는 그 아이랑, 당신이 만들겠다는 지수랑,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가 답하지 못했다.
"지수를 살리는 거랑, 지수를 바꿔서 사는 사람을 만드는 거랑은 달라."
"수아야."
"같은 얘기야. 나한테 한 얘기 그대로. 다른 시스템으로 갈아 끼운 지수는 지수가 아니야. 외할머니에서 나로 흘러내려와서 지수의 세포 안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 잘라낸 다른 사람이야. 그 사람은 우리 엄마의 손녀가 아니고, 내 딸이 아니고, 어쩌면 당신 딸도 아니야."
"수아야 — "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어. 건강할 수 있어. 오래 살 수 있어. 다 좋아. 다만, 그 사람이 누구의 딸인지를 묻는 자리에서 — 그 사람의 답은 우리가 아니야."
그가 답하지 못했다.
"옆방에서 자고 있는 지수가 자기를 누구라고 알면서 자라기를 원해, 당신은? 그 답이 우리가 아닌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해?"
그가 식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갓등 아래 두 손의 그림자가 종이 위에 떨어졌다. 그 그림자가 자기 그림자라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보았다.
침묵이 길었다. 그 침묵 안에서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기가 수아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 입을 안 다물고 싶다는 것을. 평소에 그가 침묵으로 받았던 자리에서, 지금은 침묵이 더 무거웠다.
"수아야."
"응."
"당신은 결정하기 쉽지."
수아가 그를 보았다.
"당신은 떠나는 사람이니까."
"……."
"남는 사람은 나야. 당신 떠나고 지수 자라는 동안 매일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은 나야. 당신 떠난 자리에서 지수가 아프기 시작하는 걸 볼 사람은 나야. 당신 어머니가 32살이었고 당신이 30대고 지수가 32살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 — 그 32살을 향해서 30년을 셀 사람은 나야."
"……."
"당신이 지금 말하는 거 — '지수를 지수로 두어라' — 그게 옳을 수도 있어. 옳다고 치자. 그래도 그 말을 들고 32살까지 함께 살아갈 사람은 나야. 당신은 그 자리에 없을 거야. 당신은 엄마처럼 가버릴 거야."
"죽음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야. 산 자 — 아니, 살아남은 자의 것이지."
그가 머그를 한 번 더 잡았다. 차는 거의 식어 있었다.
"그게 무서워." 그가 말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거 가설이 가설로만 끝나면 — 나는 지수가 아프기 시작하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랑 똑같이 한 번 더 무력해야 해. 한 번 사람을 잃은 손이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사람을 잃어야 해. 당신은 그게 어떤 건지 모를 거야. 당신은 떠나니까. 남는 게 어떤 건지 당신은 모를 거야."
수아가 한참 답하지 않았다.
식탁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한 번 따라 만졌다. 그 동작이 무엇을 위한 동작인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수아가 자기 안의 어떤 자리를 다시 정돈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맞아."
수아가 마침내 말했다.
"나는 떠나는 사람이야. 당신 말이 맞아. 미안해."
"수아야."
"미안해. 진짜로."
수아의 눈이 한 번 젖었다. 그러나 울지는 않았다. 손등으로 한 번 닦지도 않았다. 그 눈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마르도록 두는 종류의 눈물이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하려고 그래." 수아가 말했다. "내가 떠나는 사람이고, 당신이 남는 사람이라서, 내가 떠나기 전에 당신한테 두 가지 약속을 받고 싶어."
"……."
"하나만 받지 않고 두 개 받으려고 그래. 그게 당신한테 미안한 부분이야."
그가 끄덕였다.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첫째." 수아가 말했다. "자기 자신은 막지 마."
"……."
"내가 아마도 당신이 그 가설에 대해 연구하는 걸 막을 수 없을 거야. 그게 당신의 일이니까. 그걸 좋아하고, 아마 당신 스스로 그걸 중단하지도 못할 거야."
"……."
"당신이 평생 그 가설을 들고 가서, 그 가설이 어디로 가든 — 그건 당신 자리야. 내가 가지 못하는 자리고,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자리야. 당신이 하는 거지."
그가 답하지 못했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기를 살리려는 가설 앞에서 자기는 빼고 가라는 사람의 말을 그는 처음 들었다.
"둘째." 수아가 천천히 말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지수한테는 손대지 마."
"……."
"당신이 그 가설을 끝까지 풀어서 — 어느 날 그게 사람한테 적용할 만한 게 됐다고 치자. 그날이 와도, 지금 옆방에서 자고 있는 그 아이한테는 손대지 마. 지수가 자라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자기 결정으로 스스로 하겠다고 당신한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그 전까지는 어떤 형태로도 손대지 마."
"수아야."
"내가 떠나면 당신은 지수를 살리고 싶을 거야. 살리려고 어떤 일이든 할 거야. 4년 동안 자기 자신을 안 막은 당신이니까. 그래서 지금 당신한테 약속을 받는 거야. 살아 있는 내가, 당신한테 직접 듣고 싶어."
"……수아야."
"지수가 32살이 될 때까지 카운트하는 게 당신이라는 거 — 그것도 알아.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나는 정말 모를 거야. 미안해. 그래도 약속해. 약속하지 않으면 내가 편안하게 가지 못할 거야."
"……."
"약속해줘."
그가 한참 동안 답하지 못했다.
식탁 위에 펼쳐진 종이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Glycolysis. 새의 안구 단면도. ATP 수율 비교표. 무산소 진핵세포 사례. 한 달 동안 그가 자기 가방 안에 숨겨 들어왔던 자료들. 그 자료들이 수아에게 발견되어, 갓등 아래 다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수아의 두 가지 약속이 얹혀 있었다.
그는 한 가지를 알았다. 이 식탁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그 약속을 하지 않으면 — 수아는 더 이상 자기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또 한 가지. 자기가 그 약속을 입으로 한다고 해도, 그 약속이 자기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입으로 답했다.
"약속할게."
"두 가지 다?"
"두 가지 다."
"고마워."
수아가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그 약속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아는 천천히 일어섰다. 식탁 위의 종이를 한 묶음으로 그러모아 식탁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 종이들은 이제 자기 손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먼저 잘게. 말을 많이 했더니 좀 피곤하네."
"그래."
"지수 새벽에 한 번 깨면 우유 줘."
"…그래."
"당신 차 따뜻하게 다시 마셔. 다 식었네."
"……그래."
수아가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한 손으로 식탁 가장자리를, 다음에 의자 등받이를, 다음에 거실 등잔 옆의 책장을 짚으며. 그가 그 걸음을 끝까지 보았다. 침실 문이 닫혔다. 그 안에서 매트리스가 한 번 가라앉는 소리가 났다. 그 이후로는 소리가 없었다.
그가 식탁에 혼자 남았다.
그는 한참 동안 종이를 보았다. 그러다 종이 한 장을 들어 갓등 가까이 가져갔다. Pecten oculi. 1660년대부터 미스터리였던 조류 안구 내부 구조물. 산소 공급기로 추정되었다가, 사실은 포도당 공급기이자 젖산 회수기였던 것. 새는 시력을 위해 망막에서 혈관을 제거해 버렸고, 그 결과의 무산소 상태를 빗살돌기가 대사적으로 지탱했다. 종이 안에 들어 있는 정보는 그가 이미 외울 만큼 본 정보였다.
그가 그 종이를 식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자기 안에서 한 가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것은 새 가설의 자리가 아니었다. 가설은 이미 그 자리에 있었고, 한 달 전부터 거기 있었고, 오늘 밤 그 자리가 수아의 갓등 아래에서 한 번 발화된 것뿐이었다.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두 개의 약속.
첫 번째 약속은 그를 풀어주는 약속이었다. 수아가 그에게 가설을 연구해 보라고 했다. 그 허락은 그가 받을 자격이 있는 종류의 허락이 아니었다. 그러나 허락을 받았다.
두 번째 약속은 그를 묶는 약속이었다. 지금 옆방에서 자고 있는 그 아이에게는 손대지 말라는 것. 지수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하겠다고 할 때까지, 그 약속이 그를 묶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그는 그날 밤에 다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밤 식탁 앞에서 그가 안 것은, 그 약속이 자기를 어딘가에서는 절대로 안 풀어줄 약속이라는 것뿐이었다.
두 개의 약속이 자기 안에서 서로를 대치하고 있었다.
그가 차 머그를 들었다. 차는 다 식어 있었다. 따뜻하게 다시 데우라고 수아가 말했지만 그는 차를 데우지 않고,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침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수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로. 한쪽 손으로 문틀을 짚고.
"현철아."
"응."
"오늘 들어줘서 고마워."
"……."
"이 얘기 한 달 동안 혼자 생각했어. 당신이 안 들어줄까 봐 무서웠어."
그가 일어서려고 했다. 수아가 손을 살짝 들어 그를 자리에 두었다.
"앉아 있어. 식탁 위에 종이 그대로 두고 와. 내가 내일 정리할게."
수아가 다시 침실 문을 닫았다.
그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종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식탁 위의 갓등이 천천히 흔들리지 않고 켜져 있었다. 한참 후에 그는 일어섰다. 갓등을 끄지 않고, 종이를 정리하지 않고, 식어버린 차도 그대로 두고,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침실로 가는 길에 그가 지수 방 문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야간등의 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안에서 작게 뒤척이는 소리가 한 번 났다. 그 다음에는 다시 조용해졌다.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아도, 문 안쪽에서 그 숨소리가 계속되고 있을 것을 그는 알았다. 또래 어른의 것보다 한 박자 빠른 종류의.
그가 자기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에 들어섰을 때 수아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등을 보이고. 호흡이 일정했다. 잠든 척하는 호흡이 아니라 정말 잠든 호흡이었다. 한 달을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호흡이었다.
그가 옆에 누웠다.
지수의 숨쉬는 소리와 수아의 호흡이 겹쳐져 천장에 사인파를 그리며 비껴가고 있었다. 식탁 위의 갓등이 거실 쪽 문 너머로 가는 노란 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 선은 끄지 않은 등에서 오는 선이었다. 그가 일어나서 그 등을 끄러 가지는 않았다.
각주
MELAS (Mitochondrial Encephalomyopathy, Lactic Acidosis, and Stroke-like episodes): 미토콘드리아 DNA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희귀 유전 질환. 미토콘드리아의 에너지 생산이 손상되어 ATP가 부족해지고, 그 보상으로 세포가 혐기성 당분해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젖산이 축적된다. 발병은 보통 청소년기에서 30대 초반 사이로, 환자는 점진적인 근육 약화, 뇌졸중 유사 발작, 인지 저하를 겪다가 30대 또는 40대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모계 유전: 미토콘드리아 DNA(mtDNA)는 핵 DNA와 달리 부모 양쪽에서 절반씩 받지 않고, 어머니의 난자에 들어 있던 미토콘드리아로부터만 거의 전적으로 유전된다. MELAS 역시 어머니에게서 자녀로 전달되며, 어머니가 환자라면 그 자녀는 거의 100퍼센트 같은 돌연변이를 물려받는다. 다만 미토콘드리아 이형성(heteroplasmy) 비율에 따라 자녀의 발병 시점과 중증도는 달라진다.
호기성 대사 vs. 혐기성 대사: 호기성 대사는 산소를 이용해 포도당을 완전히 분해하며, 미토콘드리아의 TCA 회로와 전자전달계를 거쳐 포도당 한 분자당 약 30~36개의 ATP를 만든다. 혐기성 대사는 산소 없이 세포질에서 포도당을 피루브산까지만 분해한 뒤 젖산으로 마무리하며, 같은 양의 포도당에서 단 2개의 ATP를 생산한다. 효율 차이는 약 15배 이상.
와버그 효과(Warburg Effect): 1920년대 독일 생화학자 오토 바르부르크(Otto Heinrich Warburg)가 발견한 암세포 대사의 특이성. 정상 세포는 산소가 충분할 때 호기성 대사(미토콘드리아 산화 인산화)로 ATP를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대부분의 암세포는 산소가 충분해도 일부러 호기성 대사를 억제하고 세포질의 당분해(혐기성 경로)에 크게 의존한다. 이를 호기성 당분해(aerobic glycolysis) 또는 와버그 효과라고 부른다. ATP 수율은 떨어지지만, 빠른 분열에 필요한 생합성 중간체 공급과 미세환경 산성화(젖산 분비) 측면에서 종양에게 유리하다.
새의 무혈관 망막과 빗살돌기(Pecten oculi): 조류의 망막에는 척추동물 중 유일하게 모세혈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빛이 시각 세포에 도달하기 전에 어떤 혈관 그림자에도 가리지 않으므로 극단적인 해상도를 얻지만, 산소 공급이 사라진다. 조류는 이 결손을 안구 내부에 돌출된 빗살 모양 혈관 조직 '빗살돌기(Pecten oculi)'로 보완한다. 1660년대 클라우디우스 페로의 기재 이래로 빗살돌기의 기능은 오랜 미스터리였으며, 한동안 '망막에 산소를 직접 공급하는 기관'으로 추정되었다. 2010년대 이후 정밀 측정 결과, 빗살돌기는 산소가 아니라 포도당을 안구 내액으로 분비하고 망막이 만들어내는 젖산을 회수하는 '대사 보급소'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의 망막 세포는 만성적 무산소 상태에서 초가속 당분해로 에너지를 자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