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인간이 자아를 인지하는 도구일까

쿠사나기모토코

쿠사나기 모토코와 김수연

내 소설 『그녀, 내남편』에는 자율주행 트럭의 비정상적 사고로 몸을 잃게 된 남자(준우)가 병원에 하나밖에 없는 여성형 바이오 바디에 이식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꽤 많다. TS 또는 Trans Sexual(트랜스섹슈얼)로 분류되고 웹소설에서 자주 차용되는 플롯이다. 하지만 아침에 깨어나 보니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서두와 같이 사고로 몸이 말 그대로 부서졌다.

"사고 당시 트럭에 적재되어 있던 산업용 화학 물질이 유출되었습니다. 그게 차량 내부로 스며들면서 남편분의 하반신과 주요 장기에 심각한 화학적 화상을 입혔습니다. 물리적 충격보다 그게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현재 전신 다발성 장기부전 상태이며, 생물학적 육체는 이미 '기능 정지'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준우는 사고를 대비한 바디 교환 보험이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는 여성형 바디밖에 없었고 시간이 없었다. 추출된 뇌는 준비된 여성형 바디에 이식되었다.

그(그녀)는 이제 여성이 되었고 법적으로도 여성으로 인정받지만 바이오 바디의 과도한 외부 자극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그녀의 이야기를 쓰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모토코"가 계속 떠올랐다. 기계 몸에 인간의 뇌를 가진 여성. 수연을 쿠사나기 모토코처럼 그릴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건 불가능했다. 수연은 계속해서 감각에 고통스러워하고, 몸의 변화에 괴로워했다. 호르몬은 성격을 바꾸고 의존성을 늘려서 독립적이던 성격마저 의존적으로 바꾼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서 살려내는 선택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인다.

공각기동대의 그녀는 "자신"을 의심한다. 내 머릿속에 "뇌"가 있긴 할까? "아무도 자신의 뇌를 본 적은 없다"라고 말하며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전례가 있으니 나도 작품 속의 그녀에게 "자신"을 의심하는 플롯을 넣어야 할까? 하지만 내 작품 속의 그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몸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통은 자아를 의심할 만한 시간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괴로웠다. 작아진 키와 팔 길이 때문에 허우적거렸고, 익숙하지 않은 손 때문에 컵을 깨고 손을 베었다. 달라진 몸은 사용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날지 못하는 키위새와 비교했지만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공각기동대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에, 쿠사나기 모토코가 다각 전차의 해치를 강제로 열기 위해 애쓰다가 의체의 팔 근육이 찢어지고 팔이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처음 봤을 때는 꽤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전까지 그녀는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봤지만 그 장면 이후의 그녀는 다른 존재로 보였다. 그녀는 의체의 신호를 — 그러니까 고통이라는 것을 — 뇌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반면에 수연은 호르몬을 끌 수도 없고, 점막의 감각을 막을 수가 없었다. 4배의 감각(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을 가진 그녀의 몸은 모든 신호를 뇌로 보냈다. 그녀의 뇌는 매 순간 모든 것을 받았다. 끌 수 없었다.

고통은 인간이 자아를 인지하는 도구일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생각만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몸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한 사람들이 SF에는 꽤 있다. 그렉 이건의 SF 소설 『디아스포라』에는 아예 몸이 없는 인간이 나온다. 공각기동대의 인형사와 비슷한 존재다. 다만 인형사는 쿠사나기와 연합해서 몸을 필요로 했지만, 디아스포라의 시티즌은 그조차 없다. 그리고 — 이게 흥미로운데 — 그들에게는 자아에 대한 회의가 없다.

매트릭스 1편에서 에이전트 스미스는 모피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자기 현실을 고통과 비참함을 통해 정의한다."

고통을 제어할 수 있는 쿠사나기는 자아에 대해 의심하고, 고통을 제어할 수 없는 수연은 자아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디아스포라의 시티즌 역시 자아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의심은 너무 많이 느끼는 사람에게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사이의 좁은 자리에서만 일어난다.

이 명제는 맞을까?

보편 명제로는 약하지만, 이 두 사람을 보는 데는 도움이 됐다. 비슷한 두 케이스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이 역치를 넘어가면 남는 것은 오로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받는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소설에서의 수연은 1부가 끝나도록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다. 종국에는 아내로부터 버림받고 스스로 떠나지만, 아내가 위기에 처하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여전히 그녀는 아내의 사랑을 갈망한다. 그 갈망은 준우의 것일까? 수연의 것일까? 이것을 아직도 헷갈려 하고 있는 나(작가)의 것일까?

2부를 써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아직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시작도 못 하고 있다. 그녀를 고통에서 풀어줄 것인가, 아니면 계속 고통 속에 스러지도록 놓아둘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쿠사나기는 원작(만화책)에서는 그다지 자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명랑한 캐릭터이다. 해야 할 일과 방법을 너무 잘 알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다. 그녀가 강한 사이버 바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동료들에게는 크나큰 힘이 된다. 왜 수연은 인간과 다른 몸을 가지고도 인간처럼 여전히 고통받는가? 몸이 바뀌어 고통받고, 호르몬 때문에 사고의 틀이 바뀌어도 자신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변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쿠사나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부품이 결코 적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이 필요해"

나는 아직 그녀(수연)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다. 놀랄 정도로 많은 것들은 무엇일까? 통증, 호르몬, 익숙한 손, 익숙한 키, 익숙한 목소리, 자기를 자기로 부르는 사람들. 그중에 수연이 가진 것은 — 어쩌면 — 뇌 하나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일까?

고통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그 고통이 이전의 그녀와는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은 알 것 같다.

http://pnet.kr/novels/her-my-hus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