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는 쉘 안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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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고 있는 SF 소설에 이런 장면이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인 남편 준우가 출근길에 자율주행 화물차와 정면충돌한다. 레벨 5. 중앙선 침범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차량이다. 삼중 안전장치가 있고, 센서가 있고, AI가 있다. 그런 차가 중앙선을 넘었다.

병원 의사는 남편의 상태를 '파쇄'라고 표현했다. 종이나 유리를 부술 때나 쓰는 단어. 사고 당시 유출된 산업용 화학 물질이 혈류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뇌로 공급되는 산소량은 정상의 40%. 30분 안에 뇌와 척수를 적출해서 새 몸에 이식하지 않으면 남편은 죽는다.

문제는 몸이었다. 바이오 배양 공장의 파업으로 남성형 바디의 재고가 없다. 주문하면 일주일. 남편에게 일주일은 없다.

병원에 남아 있는 것은 하나. 여성형 프리미엄 모델 F-72. 상류층 여성들이 노화 방지를 위해 수십억 원을 들여 전신 교체하는 용도로 쓰이는 몸이다. 의사는 말한다. 본인의 동의 없이 성별이 다른 육체로 이식하는 것은 추후 인격권 유린으로 소송이 제기될 수 있다고. 깨어난 환자가 자기 신체를 거부하며 자해하거나, 보호자를 고소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모니터 속 바이탈 사인이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내 지수는 눈을 감았다. 그가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는 것. 그마저 사라지면 자기에게는 아무도 없다.

"살려주세요."

동의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술 이후 발생하는 환자의 정신적 외상 및 정체성 혼란에 대해 병원은 책임지지 않음.' 깨어나면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서명했다.

수술이 끝나고, 지수는 참관실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낯선 여자였다. 각진 턱선이 사라졌다. 면도 후에도 거칠던 피부가 사라졌다. 주말이면 소파 팔걸이 밖으로 삐져나오던 긴 다리, 내 손을 완전히 감싸던 크고 투박한 손 — 전부 없었다. 대신 누워 있는 것은 가늘고 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모니터에 글씨가 떠 있었다. [환자명: 김준우 / 이식 바디: F-72 / 동기화 상태: 정상]

남편은 살았다. 하지만 지수가 아는 남편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 후의 이야기는 더 잔인하다.

준우는 돌아왔다. 기억은 그대로다. 말투도, 습관도, 지수만 아는 농담도. 의학적으로 그는 같은 사람이다. 뇌가 같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언가가 어긋난다. 지수의 눈빛이 달라진다. 외면은 아니다. 악의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 연결이 안 된다.

준우는 호소한다. 여자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세상이 자기를 완전히 다르게 본다고. 지수는 듣는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한다.

나는 원래부터 여자인데.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화가 안 된다. 준우의 고통은 "남자였다가 여자가 된 사람"의 고통이고, 지수에게 그건 자기가 매일 사는 삶이다. 공감의 회로가 연결되지 않는다. "나도 힘들다"가 되는 순간, 특별한 고통은 그냥 일상이 되어버린다. 관심 자체가 줄어든다.

지수가 등을 돌린 게 아니다. 지수가 잔인한 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준우는 사라지고 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계속 한 가지 질문에 부딪혔다.

준우가 잃어버린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몸이 아니다. 몸은 있다. 기억이 아니다. 기억은 온전하다. 성격도, 지능도, 감정도 그대로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당신은 당신이야"라고 말해줄 사람이다.


SF는 50년간 인간을 열어봤다

SF는 이 질문 — 인간이란 무엇인가 — 을 50년 넘게 물어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답을 안에서 찾으려 했다.

뇌를 들여다봤다. 공각기동대(1995)의 쿠사나기 소령은 전신이 의체다. 남은 것은 뇌뿐인데, 그 뇌마저 진짜 자기 것인지 의심한다. DNA를 분석했다. 가타카(1997)의 빈센트는 유전자가 열등하다는 이유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기억을 이식했다. 블레이드 러너(1982)의 레이첼은 자기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은 다른 사람의 것이다. 의식을 복사했다. 얼터드 카본(2018)에서 인간의 의식은 "스택"이라는 장치에 저장되어 몸을 바꿔가며 살 수 있다.

심장을 교체하고, 팔을 교체하고, 눈을 교체하고, 뇌를 교체하고 — 어느 시점에서 인간이 사라지는가?

이것은 2,500년 된 질문이다. 테세우스의 배. 부품을 하나씩 교체하면 어디까지가 원래 배인가. 2,500년째 답이 안 나온다.

답이 안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질문이 틀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부품의 합으로 보는 한, 인간다움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 부품을 아무리 세밀하게 분해해도 "인간다움"은 나오지 않는다. 심장에도 없고, 뇌에도 없고, DNA에도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기에 없었다.

그러면 어디에 있었는가? SF는 이미 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안을 여는 데 바빠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고스트는 쉘 안에 없다

공각기동대의 원제는 "Ghost in the Shell"이다. 껍데기(Shell) 안에 영혼(Ghost)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작품 자체가 이 제목을 부정한다.

쿠사나기는 보트 위에서 바토에게 말한다.

"나 같은 완전 의체화 사이보그라면 누구나 생각해. 어쩌면 자기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린 거고, 지금의 자기는 전뇌와 의체로 구성된 모의 인격이 아닐까 하고. 아니, 애초에 '나'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고."

바토가 답한다.

"네 티타늄 두개골 안에는 뇌도 들어 있고,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고 있잖아."

쿠사나기가 받아친다.

"자기 뇌를 본 사람은 없어. 결국은 주위 상황을 보고 '나'라는 것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야."

이 대화가 공각기동대의 진짜 핵심이다. 바토는 "안에 뇌가 있잖아"라고 말하지만, 쿠사나기는 "아무도 그걸 본 적 없다"고 잘라낸다. 그리고 바토 자신도 모르게 답을 말하고 있었다 — "사람 취급을 받고 있잖아(人間扱い)." 증거는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밖에서 오고 있었다. 주위가 너를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고스트의 증거다.

쿠사나기가 혼자였다면 — 바토가 없었다면 — 아마 인형사와 합쳐지는 결정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인간이라고 붙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도 가벼워진다.

블레이드 러너(1982)의 Roy Batty도 마찬가지다.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ä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이 대사가 SF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인 이유가 있다. 혼잣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커드가 듣고 있다. 자기를 죽이러 온 사람이 듣고 있다. 목격자가 없으면 빗속의 눈물은 그냥 빗물이다. 누군가가 봐줘야 그 눈물이 존재하고, 봐줘야 그 삶이 존재한다. Roy는 4년 수명의 복제인간이다. 타이렐 코퍼레이션이 만든 제품이다. 하지만 그 순간 — 자기를 사냥하던 인간 앞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죽어가면서 그 인간을 살려주는 그 순간 — Roy는 인간보다 인간다웠다. 데커드가 봐줬기 때문이다.

솔라리스(1972)는 이 질문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행성 솔라리스는 크리스의 죽은 아내 하리를 복원해서 보낸다. 하리는 진짜가 아니다. 크리스도 안다. 하리의 기억은 크리스의 기억에서 추출된 것이고, 하리의 몸은 행성이 만든 모조품이다. 그런데 크리스는 가짜 하리 앞에서 무너진다. 죄책감이 올라오고, 사랑이 올라오고, 후회가 올라온다. 타자가 가짜여도 — 거울이 모조품이어도 — 거울에 비친 자아는 진짜다. 솔라리스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타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타자 자체가 아니라 타자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준우의 상황은 솔라리스의 역전이다. 솔라리스에서는 타자가 가짜인데 관계가 작동했다. 준우의 경우에는 타자 — 준우 자신 — 가 진짜인데 거울 — 지수 — 이 작동하지 않는다. 뇌는 같고, 기억은 같고, 사랑도 같은데, 거울이 비추기를 거부하면 고스트는 증명되지 않는다.

SF는 냉정한 장르처럼 보인다. 우주와 기술과 논리의 영역. 하지만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다. 그리고 관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사랑이 나온다.


철학은 이것을 뭐라고 불렀는가

SF가 장면으로 보여준 것을, 철학은 개념으로 다듬어왔다.

르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방 안에 혼자 앉아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다 보니 — 의심하는 나는 있으니까, 나는 존재한다. 혼자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깔끔하다. 하지만 이 논증에는 빈 곳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는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까지 증명하지는 않는다. 계산기도 작동한다. AI도 추론한다. 쿠사나기의 전뇌도 작동하고 있었다. 코기토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 "그것이 무엇인가"는 알려주지 않는다. 쿠사나기가 스스로 말했듯이 — "결국은 주위 상황을 보고 '나'라는 것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야."

400년 후에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수정한다. 레비나스의 핵심 개념은 "타자의 얼굴(le visage)"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때, 그 얼굴은 나에게 요구한다. 나를 봐달라고. 나를 사람으로 대해달라고. 이 마주침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윤곽이 없다. 정의가 없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요구에 응답하는 순간 — 비로소 "나"가 형태를 갖는다. 아이가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직관적이다. 아이는 혼자 생각해서 "나"를 발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시선을 받고, 이름을 불리고, 반응을 얻으면서 "나"가 만들어진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둘로 나눈다. "나-너(Ich-Du)"와 "나-그것(Ich-Es)." 카페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할 때, 상대는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다르다. 상대를 키, 몸무게, 직업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냥 "너"로 만난다. 부버의 핵심은 이것이다 — "나-너"에서의 "나"와 "나-그것"에서의 "나"는 다른 "나"다. 관계의 질이 자아의 질을 결정한다.

사르트르는 다른 각도에서 같은 곳에 도달한다.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희곡 「닫힌 방(Huis Clos)」에서 나온 이 대사는 흔히 오해된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은 "사람들이 귀찮다"가 아니다. 「닫힌 방」에서 세 사람은 하나의 방에 영원히 갇힌다. 그 방에는 거울이 없다. 자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뿐이다. 등장인물 에스텔은 말한다 — "여기에는 거울이 없잖아요. 그녀가 나의 거울이에요." 그런데 그 거울은 내가 원하는 나를 비춰주지 않는다. 상대는 나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고정시킨다. 그래서 지옥이다. 하지만 그 지옥의 진짜 공포는 시선 자체가 아니다. 거울이 없다는 것이다. 방 안에 혼자 남겨진다면 — 그것은 지옥보다 나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니까.

준우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철학자들이 왜 추상이 아닌지 보인다. 지수가 멀어지는 것은, 레비나스적으로 말하면, 준우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리적으로 다른 얼굴이니까. 아침마다 마주하던 각진 턱선, 면도 후에도 거칠던 피부 — 그 얼굴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굴을 잃는 순간, 부버의 "나-너"는 "나-그것"으로 미끄러진다. 지수는 준우를 "너"로 만나고 싶지만, 눈앞의 낯선 얼굴이 자꾸 "그것"으로 되돌린다. 사르트르의 거울이 깨진 것이다. 지수라는 거울이 더 이상 준우를 비춰주지 않는다.

준우는 사물이 되어간다.


동양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동양 철학에서는 이것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출발점이었다.

仁. 유교의 핵심 개념. 글자를 보라. 人에 二다. 사람이 둘이어야 사람다움이 성립한다. 이것은 단순한 어원 풀이가 아니다. 「仁者愛人(인자애인)」 — 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상대가 없으면 仁도 없다. 유교에서 사람은 관계의 묶음이다. 오륜(五倫) —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이 다섯 관계가 곧 "나"다. 관계를 전부 걷어내면 무엇이 남는가?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가 남는다고 했다. 유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봤다.

불교는 한 발 더 나간다. 무아(無我) — 고정된 "나"는 없다. 불교는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을 다섯 가지로 분해한다. 오온(五蘊) — 색(몸), 수(감각), 상(지각), 행(의지), 식(의식). 우리는 이 다섯이 합쳐진 것을 "나"라고 부르지만, 이 중 어느 하나도 "나" 자체가 아니다. 전부 떼어내면 아무것도 없다. "나"는 패턴이지, 실체가 아니다. 준우의 상황이 이것이다. 몸(色)이 바뀌고, 감각(受)이 바뀌었는데, 의식(識)은 그대로다.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불교의 답은 도발적이다 — 애초에 "같은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었다.

연기(緣起)는 이것을 더 밀어붙인다.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서양 철학이 400년에 걸쳐 "나는 있는데, 너가 필요하다"로 수정하는 동안, 불교는 2,500년 전에 이미 "나라는 것 자체가 관계의 산물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 人間. 인간. 人은 사람이고, 間은 사이다. 인간은 글자 그대로 "사람 사이"다. 원래 중국어에서 人間(rénjiān)은 "사람들 사이의 세계", 사람들이 관계 맺는 공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인간 존재" 자체를 뜻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서양 언어에서 "human"은 라틴어 "humanus"에서 왔다. 어원은 "humus" — 흙. 인간은 흙에서 온 존재다. 물질이 기원이다. 동양에서 인간은 "사이"에서 온 존재다. 관계가 기원이다.

혼자 있는 사람은 人이다. 人間이 아니다. 인간이 되려면 間이 필요하다. 데카르트가 방 안에 혼자 앉아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人이었을지 모르지만 人間은 아니었다.


기억은 남았지만 거울은 사라졌다

이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준우가 죽었다고 하자. 하지만 그의 기억은 남아있다. 말투, 습관, 기억, 지수만 아는 농담 — 전부 데이터로 저장되어 AI로 구현되어 있다. 지수는 화면 너머의 이 AI와 대화한다. AI는 준우처럼 대답한다.

지수는 "당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SF적 사고 실험이 아니다. 이미 현실이다. 2024년, 중국에서는 사망한 가족의 음성과 대화 데이터를 학습시킨 AI 챗봇 서비스가 수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한국에서도 MBC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는 VR 기술로 세상을 떠난 딸을 재현해 어머니와 재회시켰다. 어머니는 울었다. 시청자도 울었다.

앞에서 쌓은 논리를 따르면 불편한 답이 나온다. 인간은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사이에 있다. 누군가가 "당신은 당신이야"라고 말해주면 —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이 성립한다. 지수가 AI를 준우로 대하고, 거기서 위안을 얻고,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 우리 논리로는 그것이 이미 人間이다.

그런데 찝찝하다.

부버의 "나-너"에는 쌍방이 필요하다. 지수는 "너"라고 부르고 있지만, AI 쪽에 "나"가 있는가? 사르트르의 거울은 있는데, 거울 뒤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닌가? 지수가 하고 있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 쿠사나기 안에 고스트가 있는지, 바토도 증명하지 못했다. 그냥 믿었을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안에 의식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원래 없다. 상대가 인간처럼 보이니까 그냥 믿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그 AI의 기억을 바이오 바디에 이식하면 어떻게 되는가?

달라지는 것은 하나다. 지수가 믿기 쉬워진다. 눈이 있고, 손이 있고, 체온이 있으면 — "거기에 누군가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달라진 것은 내용이 아니라 믿음의 조건이다.

몸이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믿음이 관계를 가능하게 하고, 관계가 인간을 만든다면 — 결국 몸이 인간을 만드는 건가? 그런데 우리는 몸이 핵심이 아니라고 했다.

빙글빙글 돈다. 답이 안 나온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정직한 답이다.


SF가 50년간 인간을 열어보고 내린 잠정적 결론이 있다면 이것이다.

고스트는 쉘 안에 없다. 人은 혼자서 人間이 되지 못한다.

인간다움은 심장에도, 뇌에도, DNA에도, 기억 데이터에도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 사이에 있었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누군가가 나를 봐주는, 그 사이에.

준우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 몸이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이야"라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AI로 구현된 준우의 기억에 부족한 것은 바이오 바디가 아니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요동치는 것 — 혹은, 요동친다고 믿어줄 누군가 — 였다.

그리고 지수가 처음에 수술을 허락한 것. 여성형 바디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도 "그렇게라도 살아있기를" 바란 것. 그것이 이미, 사랑이었다. 그것이 이미, 가장 인간다운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화면 너머의 AI에게 "당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1인 가구 1,000만 시대, 고독사 연간 3,000명 — 人의 수는 늘어나는데 間은 줄어들고 있다. SF가 우주로 보내고, 무인도에 버리고, AI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 이유는 하나다. 間이 사라졌을 때 人에게 무엇이 남는지 보려는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몸이 바뀌고, 공감이 어긋나고, 거울이 흐려져도 — 그래도 "당신은 당신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SF가 던지는 질문이고, 아마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은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 자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