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41,끝) - 지수
에필로그
LA행 비행기 창밖으로 구름이 흘러갔다.
13시간. 아직 8시간이 남았다. 나는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깨어났을 때,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흰 천장. 소독약 냄새. 규칙적인 기계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수연은 어디 있지?
유진 언니는?
마이클 강이 병실로 들어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 후였다. 그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흰 백합. 향기가 병실에 퍼졌다.
"깨어나셨군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눈가에 안도가 어려 있었다. 아니,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수연은요? 유진 언니는요?"
"두 분은... 떠나셨습니다."
"떠났다고요?"
"개인 사정이 생기셨답니다. 급하게. 지수 씨가 깨어나시기 전에 가셔야 했답니다."
"연락처라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이클 강이 꽃병에 백합을 꽂았다. 창가에 놓았다.
"하지만 지수 씨가 건강을 되찾으셨으니, 그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가 나간 후, 휴대폰을 꺼냈다.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가 없었다.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했다. 유진 언니도 없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폰에서 사라져 있었다.
마이클 강에게 물었다. 혹시 연락처를 찾아볼 수 있냐고.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결과는 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묻지 않았다.
수연은 나와 함께 있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남자였던 사람이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떠난 게 어쩌면 서로를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유진 언니는 왜 떠났을까? 그녀는 올 때도 문득 왔으니 갈 때도 문득 가버렸나 보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두 달 후, 퇴원했다.
몸이 가벼웠다. 전에 없던 에너지가 느껴졌다. T-오가넬. 유진 언니가 내 몸에 넣어준 것. 결함 있는 미토콘드리아를 대체하고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인공 기관. 덕분에 나는 다시 살 수 있었다.
왼손 끝의 미세한 떨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서명할 때 펜이 흔들렸다. 의사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뇌가 재가동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모든 회로가 예전처럼 돌아오려면 더 필요하다고.
출근했다. 칼릭스 본사. 35층 의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비서들이 일어서서 인사했다.
"의장님, 어서 오세요."
의장. 그 단어가 낯설었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책상에 앉았다. 창밖으로 송도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졌다. 마치 원래 내 자리였던 것처럼, 의자는 내 몸에 잘 맞았다.
이사회 의장. 칼릭스 바이오의 최고 의사결정권자. 전에 누려보지 못한 권력이었다. 수천 명의 직원, 수조 원의 자산, 미래를 바꿀 기술. 그 모든 것이 내 손안에 있었다.
메일함을 열었다. 수백 개의 메일이 쌓여 있었다. 하나씩 확인했다. 보고서, 회의 요청, 승인 건. 그리고...
제목 없는 메일이 하나 있었다.
보낸 사람도 없었다. 첨부 파일만 하나 달려 있었다. 오디오 파일.
스팸이려니 했다. 삭제하려다가, 다른 메일에 묻혀 잊어버렸다.
마이클 강은 좋은 남자였다.
점심 회의가 끝난 어느 날, 그가 커피를 가져왔다. 내 앞에 놓으면서 컵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왼손이 떨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 시선도 주지 않고. 그냥 했다.
수연은 내 왼손이 떨릴 때마다 눈이 어두워졌다. 미안하다는 말이 입 밖까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마이클은 미안해하지 않았다. 문제를 보면 해결했다. 감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차이가 편했다.
두 달 후, 그가 청혼했다.
레스토랑이었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작은 상자를 열었다. 다이아몬드가 빛났다. 주변 테이블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물론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웃었다. 따뜻한 미소였다.
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다. 반지 상자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생각할 시간. 그가 준 시간.
왜인지 모르겠다. 메일함을 열었다. 한 달 전에 삭제하려다 잊어버린 그 메일. 제목 없는 메일. 오디오 파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잡음이 먼저 나왔다. 전화 녹음 특유의 거친 소리. 그리고 —
수연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 윌리엄 박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이클 강의 목소리. 2초의 침묵 후에.
"제 본명은 윌리엄 L. 터너 입니다."
재생을 멈췄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마이클 강.
강.
엄마의 성이었다.
테이블 위의 반지 상자를 봤다. 다이아몬드가 천장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다시 눌렀다. 끝까지 들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녹음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기계 잡음만 남았다.
반지 상자를 집었다. 뚜껑을 닫았다. 딸깍.
비행기가 흔들렸다. 난기류였다.
눈을 떴다. 창밖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5시간 남았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비행기 모드.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이륙 전에 온 것이었다.
[유진 언니: 도착하면 연락해. 산타모니카 피어에서 만나자.]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산타모니카 해변.
택시에서 내렸다. 짠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모래사장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구두를 벗었다. 손에 들었다.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따뜻했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수평선 위로 태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주황색. 분홍색. 보라색. 하늘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다 위로 금빛 길이 뻗어 있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보였다.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긴 머리. 한 사람은 짧은 머리. 그들 옆에 아이스박스가 놓여 있었다.
걸음을 옮겼다. 모래가 발밑에서 푹푹 꺼졌다.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빨라졌다.
수연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았다. 일어섰다.
유진 언니도 일어섰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세 사람이 마주 섰다. 파도 소리만 들렸다.
1년 만이었다. 아니,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수연의 얼굴을 보았다.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뭐가 다른지 몰랐다. 같은 얼굴이었다.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술. 하지만 뭔가가...
눈이었다.
전에는 — 수연의 눈에 항상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 위의 기름처럼. 불안정하게. 지금은 고요했다. 깊고, 맑고, 가만히 있었다.
수연이 먼저 다가왔다. 나를 안았다. 어깨가 내 턱 아래에 닿았다. 체온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에서 바닷바람 냄새가 났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섞여 있었다.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었다.
"지수야."
"응."
"보고 싶었어."
"나도."
눈물이 흘렀다. 수연도 울었다. 유진 언니가 우리 둘을 함께 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꺼냈다. 코로나. 차가운 병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세 여자가 모래 위에 나란히 앉았다.
유진 언니가 병따개로 뚜껑을 땄다. 세 개. 하나씩 나눠 들었다.
"건배."
유진 언니가 말했다.
병이 부딪혔다. 딸깍. 맑은 소리가 났다.
맥주를 마셨다. 차갑고 쓴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유진 언니의 목에 흉터가 있었다. 옷깃 위로 살짝 보이는. 둥글고 작은, 무언가를 파낸 자국.
"그거 뭐야?"
유진 언니가 목을 만졌다.
"나중에 말해줄게."
"나중에."
"응. 오늘은 안 돼. 오늘은 맥주나 마시자."
수연이 웃었다. 짧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방식이 준우였다.
"삼겹살이 없네."
수연이 말했다.
유진 언니가 웃었다.
삼겹살. 옥상. 그 밤이 떠올랐다.
"지수야."
수연이 말했다.
"응."
"그 녹음 들은거지?"
"응."
"다 들었어?"
"다 들었어."
수연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뭔가 복잡한 것이 지나갔다. 미안함. 걱정. 그리고 — 묻고 싶지만 묻지 못하는 것.
"미안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많았다. 미안하다는 말. 설명해야 할 것들. 서류에 서명하며 수연 대신 일을 택했던 날들. 마이클의 말을 믿고 분노했던 것. 전화를 걸지 않았던 것. 하지만 나온 건 —
"나도."
두 글자.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오늘은 이것밖에 못 했다.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바다가 검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내가 입을 열었다.
"그놈을 어떻게 죽이지?"
수연이 웃었다. 유진 언니도 웃었다. 나도 웃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갔다. 유진 언니가 두 번째 맥주를 땄다. 수연이 모래를 한 줌 집었다가 놓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세 여자가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