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38) - 수연
전환
문이 닫혔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오랜만이었다. 안개가 걷힌 것처럼 모든 게 또렷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1년 전 사고. 뇌 이식. 이 몸. 전부 저 사람 때문이다.
죽여버리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수가 일주일밖에 없다. 일단 그것부터 해결하자.
"언니."
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보여줬다. 녹음 앱. 1시간 23분. 저 사람이 윌리엄이라고 인정한 것. 레시피를 추출했다고 한 것. 전부 들어 있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았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거다.
"내 머리에서 레시피를 추출할 수 있어?"
"뭐?"
"은현철 박사님이 신세틱 링크로 내 뇌에 각인한 거잖아. 역으로 추출하면 되지 않아?"
유진이 잠시 생각했다.
"현철 박사님이 그랬어. 무슨 일이 생기면 언니를 찾아가라고. 그 말은 언니가 할 수 있다는 거잖아."
"장비가 필요해."
"어디 있는데?"
"회사에. 신세틱 링크 프로토타입이랑 신경망 매핑 장치. 전부 칼릭스에 있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저 사람이 준 레시피는 못 믿어."
내가 말했다.
"뭘 집어넣었는지 모르잖아. 지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러면 이렇게 하자."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단순했다.
"회사 장비를 쓴다. 이송도 동의한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저 사람 레시피는 안 써. 언니가 직접 내 머리에서 추출해. 언니가 직접 치료제를 만들어."
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어?"
"현철 박사님이 넣은 방식을 알아. 역순으로 하면 돼."
"일주일 안에?"
"해야지."
됐다. 방법이 생겼다.
"저 사람한테 말하자."
"수연아."
유진이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지수 살리는 게 먼저야."
30분이 지났다.
문이 열렸다. 마이클 강이 들어왔다.
"결정하셨습니까?"
"조건이 있어요."
내가 말했다.
"칼릭스로 이송하는 건 동의해요. 대신 당신 레시피는 안 써요."
마이클 강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면..."
"유진 언니가 직접 추출해요. 내 머리에서. 현철 박사님이 넣어둔 거. 직접 꺼내서, 직접 치료제를 만들어요."
침묵이 흘렀다. 마이클 강이 나를 바라보았다.
"제 레시피와 같은 겁니다."
"당신을 못 믿어요."
"저는 지수 씨를 살리려는 것뿐입니다."
"그건 당신 말이고."
목소리가 단단했다. 회사에서 협상할 때 쓰던 그 목소리였다.
"이 조건 아니면 안 가요."
마이클 강이 유진을 바라보았다.
"가능합니까?"
"네."
"시간은요?"
"일주일 안에요."
마이클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왜요?"
"왜라니요?"
"왜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요?"
"제 목표는 지수 씨를 살리는 겁니다. 제 레시피든 이유진 박사가 추출한 레시피든, 지수 씨가 살면 됩니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상관없다. 일단 지수를 살리는 게 먼저다.
"언제 이송해요?"
"지금 당장. 이송팀이 30분 내로 도착합니다."
마이클 강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유진이 내 손을 꽉 쥐었다.
"잘했어."
"별거 아니야."
"아니, 대단했어. 준우 같았어."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 준우 맞아."
"알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지수를 살리자. 그게 먼저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할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어떻게든 되겠지.
칼릭스 의료연구센터.
이송팀이 도착하고, 지수가 특수 앰뷸런스에 실렸다. 생명 유지 장치가 규칙적으로 소리를 냈다. 삐—. 삐—. 삐—.
나와 유진은 뒷좌석에 탔다. 마이클 강은 다른 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
유진이 지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닫힌 눈.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언니."
"응."
"할 수 있어?"
"해야지."
유진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센터에 도착했다. 지하 3층. 연구동.
흰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차가웠다. 마이클 강이 앞서 걸었고, 우리는 따라갔다.
지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유리벽 너머로 침대에 누운 지수가 보였다. 온몸에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심전도 모니터가 느리게 움직였다.
"이쪽입니다."
마이클 강이 말했다.
복도 끝에 있는 방. 문이 열렸다. '신경공학 연구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구실 안은 넓었다.
한쪽 벽면에 대형 모니터가 줄지어 있었다. 반대편에는 의료 장비들. 가운데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치과 의자처럼 생겼는데, 머리 부분에 뭔가 복잡한 장치가 달려 있었다.
"신세틱 링크 프로토타입."
유진이 말했다.
은색 헤드셋이 의자 옆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관자놀이와 귀 뒤쪽에 닿는 전극 센서가 달려 있었다.
"저걸로 추출하는 거야?"
"응. 현철 박사님이 네 뇌에 데이터를 넣을 때 쓴 것과 같은 장비야."
유진이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켜고, 케이블을 연결하고, 뭔가를 입력했다.
마이클 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 나가라고 해."
"필요 없습니다."
마이클 강이 말했다.
"어차피 모든 과정은 기록됩니다. 나중에 확인할 수 있어요."
"그래도—"
"수연아."
유진이 나를 불렀다.
"신경 쓰지 마. 저 사람이 뭘 하든 상관없어. 내가 하는 일만 집중해."
그렇다. 유진 말이 맞다. 일단 하자.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뒤로 눕혀졌다.
"긴장 풀어."
유진이 말했다.
은색 헤드셋이 내 머리에 씌워졌다. 전극이 관자놀이와 귀 뒤쪽에 닿았다. 차가웠다.
"좀 어지러울 수 있어. 눈 감아."
눈을 감았다.
"시작한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두피 안쪽을 쓸고 가는 느낌. 아프지는 않았다. 그냥 이상했다.
"뇌파 안정적이야. 신경망 매핑 시작할게."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니터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삐삐. 삐삐.
"찾았다."
유진이 말했다.
"뭘?"
"현철 박사님이 숨겨둔 데이터 클러스터. 해마 근처 신경망에 각인되어 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추출 시작한다. 움직이지 마."
머릿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물이 빠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거의 다 됐어."
삐—.
"완료."
유진이 헤드셋을 벗겨주었다. 눈을 떴다. 천장이 빙빙 돌았다.
"괜찮아?"
"어지러워."
"금방 나아질 거야. 잠깐 누워 있어."
유진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가 떠 있었다.
"이게 레시피 2.0이야?"
"응. 현철 박사님이 남긴 거. 완벽해."
유진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안도? 슬픔? 둘 다인 것 같았다.
마이클 강이 다가왔다.
"확인해도 됩니까?"
"하세요."
유진이 비켜섰다. 마이클 강이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제가 가진 것과 같군요."
"그러니까 당신 걸 안 써도 된다는 거죠."
내가 말했다. 마이클 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이 다른 방으로 갔다. 제조실이라고 했다.
나도 따라갔다. 마이클 강도 따라왔다. 신경 쓰이지만 어쩔 수 없다.
제조실은 더 복잡했다. 무균실처럼 생겼다. 유리벽 너머로 기계들이 보였다. 원심분리기, 배양기, 뭔가 거대한 냉장고 같은 것.
유진이 방호복을 입었다. 마스크, 장갑, 고글.
"여기서부터는 들어올 수 없어."
"알았어."
유리벽 앞에 섰다. 유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뭔가를 꺼냈다. 작은 바이알.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저게 뭐야?"
인터콤으로 물었다.
"T-오가넬 기본 배양체. 여기에 레시피 2.0 알고리즘을 적용해서 지수 미토콘드리아에 맞게 조정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반쯤만 알겠다. 그냥 지켜보았다.
유진이 기계를 조작했다. 모니터에 뭔가를 입력했다. 배양기에 바이알을 넣었다.
"얼마나 걸려?"
"배양하고, 검증하고, 조정하고... 이틀은 걸려."
"지수한테 일주일밖에 없잖아."
"알아. 최대한 빨리 할게."
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벽 너머로.
"수연아. 가서 쉬어. 내가 다 할게."
"싫어. 여기 있을래."
"이틀 동안?"
"응."
유진이 웃었다. 짧게.
"알았어. 그럼 옆방에 간이 침대 있어. 거기서 쉬어. 뭔가 있으면 부를게."
옆방에 간이 침대가 있었다.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수를 살릴 수 있다.
유진이 하면 된다.
어떻게든 되겠지.
휴대폰을 꺼냈다. 녹음 파일. 1시간 23분. 마이클 강이 윌리엄이라고 인정한 것. 레시피를 추출했다고 한 것. 전부 들어 있다.
지수 메일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은 비워뒀다. 본문도 비워뒀다. 녹음 파일만 첨부했다.
전송.
보험이다.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지수가 깨어나면 알게 된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짓을 했는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눈을 감았다.
지수야. 꼭 깨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