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34) - 지수
귀가
택시가 숙소 앞에 멈췄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영하 2도. 어젯밤 입고 나간 옷 그대로였다. 네이비색 재킷에 하얀 블라우스. 구겨진 옷에서 호텔 시트 냄새가 났다. 목을 만졌다. 스카프 아래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삐- 삐- 삐. 문이 열렸다.
"수연아?"
대답이 없었다.
신발을 벗었다.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 쿠션이 눌린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오래 앉아 있었던 흔적. 커피 테이블에는 물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물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차가웠다. 밤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침실 문을 열었다. 이불이 개켜져 있었다. 화장실도 확인했다. 베란다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옷장을 열었다. 수연의 옷이 줄어 있었다. 내가 사준 원피스와 블라우스는 그대로였지만, 수연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 몇 벌 안 되는 편한 옷들만 없었다. 세면대에는 칫솔이 하나. 내 것만 남아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수연의 속옷과 양말도 없었다. 작은 기내용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 울렸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여섯 번. 일곱 번. 역시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냈다.
[수연아 어디야? 전화 좀 받아.]
전송됨. 읽음 표시는 뜨지 않았다.
유진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만에 받았다.
"지수야? 왜?"
"언니, 수연이 어디 있는지 알아?"
"수연이? 어젯밤에 너 어디 있냐고 전화했었어. 그 이후로 연락 없는데. 왜? 무슨 일이야?"
손이 떨렸다. 어젯밤. 수연이 나를 찾았구나. 내가 마이클과 함께 있을 때. 호텔 스위트룸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때. 그 이후의 모든 시간 동안.
"수연이가 없어. 짐도 싸서 나간 것 같아."
"뭐?"
유진 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잠깐, 내가 연구소 쪽 확인해볼게. 어디 간 거 아는 사람 있는지. 너도 다른 데 연락해봐."
"응. 언니 고마워."
전화를 끊었다.
소파에 앉았다.
쿠션의 눌린 자국을 손으로 만졌다. 수연이 밤새 여기 앉아 있었겠구나. 나를 기다리면서. 돌아오지 않는 나를. 연락도 없이. 밤새. 이 자리에서. 혼자.
눈이 뜨거워졌다.
어젯밤이 떠올랐다. 호텔 스위트룸. 32층. 통유리 너머로 보이던 야경.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마이클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을 때. 입술이 닿았을 때. 침대로 이어졌을 때. 그 다음의 모든 것.
수연이 밤새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른 남자의 품에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이 막혔다.
제주도에서 수연이 한 일. 그때 나는 배신감을 느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남자한테 키스를 당했다고. 그것만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는 똑같은 짓을 했다. 아니. 더 나빴다. 수연은 뉴럴 쇼크 때문에 자기 몸을 통제하지 못해서였다.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알면서 했다. 원하면서 했다. 스스로 선택해서.
그 생각이 목을 조였다. 잠깐 동안.
그래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일어섰다.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정장. 흰 셔츠. 얼굴을 씻고 화장을 고쳤다. 목의 자국은 스카프로 다시 가렸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었다.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칼릭스 이사회 의장. 어제부터 내 직함이었다. 모니터를 켰다. 결재 서류 47건. MELAS 연구 관련 보고서 12건. 예산 승인 요청 8건. 인사 발령 안건 5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기를 또 확인했다. 새 메시지 없음. 부재중 전화 없음.
마이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의장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젯밤이 떠올랐다. 귀 옆에서 속삭이던 그 목소리. 낮고 뜨겁게 내 이름을 부르던.
숨을 삼켰다.
"잠깐 사무실로 와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5분 후. 노크 소리. 문이 열렸다.
마이클이 들어왔다. 검은 정장. 완벽하게 다려진 셔츠. 은색 넥타이. 어젯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수연이가 사라졌어요."
마이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사라졌다니요?"
"오늘 아침에 숙소에 갔는데 없었어요. 짐도 챙겨서 나간 것 같아요. 전화도 안 받고요."
마이클이 잠시 침묵했다.
"언제부터 연락이 안 되셨습니까."
"어젯밤 저녁에 메시지 보낸 이후로요."
그 단어가 무거웠다. 어젯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CCTV 추적이 가능합니다. 연구소 주변, 대중교통, 호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찾을 수 있습니다."
"부탁드려요. 빨리."
"알겠습니다."
마이클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한 사람의 동선을 CCTV로 추적한다. 그 말이 입에서 너무 쉽게 나왔다. 부탁드려요, 빨리. 마치 택시를 부르듯이.
두 시간이 지났다. 창밖에 해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밥은 먹지 못했다.
전화가 울렸다.
"마이클 강 대표입니다."
"연결해주세요."
"찾았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디 있어요?"
"시내 비즈니스 호텔입니다. 오전 9시 3분에 체크인했습니다. 아직 체크아웃은 안 했습니다."
살아 있다. 무사하다.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주소 보내주세요. 바로 갈게요."
"잠시만요, 의장님."
마이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수연 씨가 떠난 이유. 아마도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 겁니다."
손이 굳었다.
"뭐라고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박사님의 유언에 따라, 저의 임무는 두 분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에 개입하는 건 제 역할이 아닙니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지켜본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모든 것을. 제주도에서 수연이 한 일까지.
"하지만 지금 우리의 관계는 그 이상이 아닙니까."
목이 막혔다. 그 말의 무게. 어젯밤의 일을 이렇게 쉽게, 낮의 언어로 바꿔놓는 이 사람. 대답할 수 없었다.
"수연 씨가 떠난 건 아마도 그 사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마 알고 계신 것보다 좀 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제주도 사건, 키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귀가 멍해졌다.
"자세한 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수연 씨가 느끼는 죄책감의 무게가 의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클 수 있다는 것만."
전화가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손이 굳어 있었다.
키스로 끝나지 않았다.
제주도. 그날 밤. 수연이 화장실 다녀온다고 했었다. 20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라운지 바에서 혼자 기다리면서 불안했었다.
그리고 객실로 돌아온 후의 욕실.
수연이 혼자 씻겠다고 했다. 문을 잠그고. 물소리가 40분 넘게 이어졌다. 이상해서 문을 열었다. 수연이 샤워기 아래 쭈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 때밀이 타월을 쥔 채. 팔뚝이 벌겋게 벗겨져 있었다. 어깨가. 가슴이. 피가 배어나와 있었다.
"안 지워져."
그때는 키스 때문인 줄 알았다. 남자에게 키스당한 게 충격이어서 그런 줄.
아니었구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이 우리 삶을 얼마나 감시하고 있었던 거지. 제주도 일까지. 수연이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그리고 왜 하필 지금 말해주는 거지.
그 의문이 스쳤다가, 수연의 얼굴에 묻혔다.
수연이 나에게 키스만 했다고 거짓말했다.
손이 떨림을 멈췄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몸을 긁어댔구나. 키스 때문이 아니라 그 이상을 했으니까. 그게 지워지지 않았던 거구나.
피가 배어나올 때까지 긁어야 할 만큼의 일을. 그 생각에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짧게.
그리고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더 크고, 더 뜨거운.
나를 속였구나.
준우의 수술날이 떠올랐다. 의사가 물었다. 여성형 바디밖에 없다고. 나중에 소송당할 수 있다고. 남편이 원망할 수 있다고.
상관없었다. 살려만 달라고 했다. 무슨 짓을 해서든.
내가 뭘 했는데. 손이 떨리면서 동의서에 서명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고. 준우가 나를 원망해도 좋다고. 그래도 살려달라고.
그렇게 살려놨더니 나를 속여?
그런 짓을 해놓고 나를 버리고 나갔다고?
무의식적으로 스카프 위를 만졌다. 손이 목에 닿았다가, 재빨리 내려왔다.
수연은 뭐였지? 제주도에서. 처음 보는 남자와. 화장실에서.
이가 악물렸다.
책상 위의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결재할 것들. 검토할 것들. MELAS 연구 진행 보고서. 예산안. 인사 발령. 칼릭스 이사회 의장. 그게 지금 내 위치다.
수연은? 짐 싸서 나갔다. 아무 말도 없이. 연락도 없이. 키스만 했다고 거짓말해놓고.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마이클이 호텔 주소를 보내왔을 것이다. 찾아갈 수 있었다. 지금 당장.
하지만.
나를 버리고 나간 건 수연이다. 거짓말한 것도 수연이다. 연락 안 받는 것도 수연이다.
서류를 펼쳤다. 처음 몇 줄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에야 내용이 잡혔다. 숫자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내려앉았다. 의자가 등을 받쳤다.
펜을 들었다. 첫 장에 서명했다.
다음 장으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