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33) - 수연

기다림

밤 10시.

숙소 창밖으로 송도의 야경이 펼쳐졌다. 빌딩들의 불빛이 바다 위로 흩어지고, 멀리 달이 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마지막 메시지.

[오늘 저녁 늦을 것 같아. 먼저 자.]

두 시간 전에 온 메시지.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알겠어 언니. 조심해.]

내가 보낸 답장. 조심해. 그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뭘 조심하라는 거였을까.


밤 11시.

유진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 울리고 받았다.

"수연아? 무슨 일이야?"

"언니... 지수 언니 어디 있는지 알아?"

"지수? 오늘 이사회 있었잖아. 의장 취임식."

가슴 안쪽에서 인공 펌프가 멈칫했다.

"의장?"

"응. 지수가 이사회 의장이 됐어. 마이클 강이 추진한 거야. 몰랐어?"

몰랐다.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글쎄. 나는 연구실이야. 오늘 밤새 작업해야 해서. 지수한테 연락 안 돼?"

"메시지는 왔는데... 저녁에 늦는다고만."

"축하 파티 같은 거 아닐까? 취임했으니까. 이사진이랑 회식하거나."

축하 파티. 이사진. 회식.

그런 거겠지.

"언니 고마워. 나중에 또 연락할게."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끝부터 손목까지. 미세하게.


자정.

휴대전화 화면을 또 켰다. 새 메시지 없음. 부재중 전화 없음.

전화를 걸어볼까.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김준우라면 바로 걸었을 거다. "어디야? 걱정돼. 빨리 와." 그렇게 말했을 거다. 남편으로서. 당당하게.

손가락이 내려갔다.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다. 이불의 결이 피부 위에서 긁혔다. 미세한 직물의 올 하나하나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무시할 수 있는 감각이었다. 지금은 안 됐다. 전부 들어왔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무늬가 보였다. 페인트 자국. 미세한 금.

마이클 강.

그 이름이 떠올랐다. 지우려 해도 떠올랐다.

검은 세단. 개인 오피스. 차가운 눈.

[김수연님이 은지수를 떠나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가 원했던 것. 나와 지수 언니를 떼어놓는 것.

그때는 협박으로 했다. 제주도 일을 들먹이며.

그런데 지금은.

지수 언니를 의장으로 만들었다. 이사회 의장. 회사의 주인.

협박이 아니라 선물로.

마이클 강이 공짜로 이런 걸 해줄 리 없다. 그는 사업가다. 거래를 한다.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는다.

뭘 받으려는 걸까.

이불을 걷어찼다. 덥지 않았다. 피부가 이불을 거부했다.


일어나서 물을 마셨다. 컵이 치아에 부딪혔다. 그 소리가 두개골 안쪽까지 울렸다.

창밖을 보았다. 주차장에 언니 차가 없었다.

메시지를 보낼까.

[언니 어디야?]

[언제 와?]

[걱정돼.]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보내지 못했다.

답이 안 오면.

답이 오면.

둘 다 무서웠다.


소파에 앉았다.

TV를 켰다. 소리를 줄이고. 화면만 바라보았다. 뭐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상상이 흘렀다. 멈출 수 없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언니. 마이클 강이 옆에 앉아 있는. 잔을 기울이며 웃는.

그리고 —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하지 마.

언니는 나만 사랑해.

그런데.

나도 그랬잖아.

제주도에서. 언니만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남자와. 이 몸이 원했으니까. 남자를. 남자의 체온을.

그게 끔찍했다.

지수 언니도.

오랫동안 남자 없이 살았다. 여자인 나만 안고.

부족했을까.

내가 부족했을까.


소파 팔걸이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자세였는지 몰랐다. 시계를 볼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이클 강의 얼굴이 떠올랐다. 날카로운 턱선. 단단해 보이는 어깨. 정장 아래로 드러나는 체격.

남자였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키. 체구. 어깨. 팔. 내가 35년간 당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들. 거울 속에서 사라진 것들.

이 팔을 내려다보았다. 가늘었다. 이 손은 작았다. 주먹을 쥐어봤다. 아무것도 부술 수 없는 주먹이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뭔가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참지 않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35년간 참아왔던 것들이 — 이 몸에서는 그냥 흘렀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창밖이 밝아져 있었다.

언제 동이 텄는지 몰랐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다. 밤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으니까.

언니는 오지 않았다.

밤새.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보았다. 눈이 붉었다. 눈 밑에 그늘이 졌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MELAS.

언니의 몸 안에 시한폭탄처럼 숨어 있는 병.

레시피 2.0. 내 머릿속에 있는 것. 박사님이 남긴 유산.

결혼 전에 박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연구실에서. 차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지수를 부탁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줘라.]

그때 고개를 숙였다. 맹세했다. 반드시 지키겠다고.

지키지 못했다.

언니 곁에 있으면서도 지키지 못했다.


방으로 갔다.

왜 방으로 갔는지 — 나중에 생각하면 모르겠다. 결심이라는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움직였다.

서랍을 열었다. 작은 가방을 꺼냈다. 여행용. 기내 반입 사이즈.

옷을 넣었다. 손이 떨렸다. 접어서 넣어야 하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아서 구겨 넣었다. 속옷. 양말. 세면도구.

지수 언니가 사준 옷들이 보였다. 언니가 골라준 화장품들.

손이 옷걸이 위에서 멈췄다.

두고 갔다.


현관 앞에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가 보였다. 어젯밤 언니가 없던 침대. 소파가 보였다. 밤새 앉아 있었던 소파. 창문이 보였다. 해가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

좋았다. 힘들었지만.


신발을 신었다. 운동화. 편한 것으로.

가방을 어깨에 멨다. 가벼웠다.

문손잡이를 잡았다.

멈췄다.

마지막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메시지를 썼다.

[언니. 나 먼저 갈게.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3초.

지웠다.

쓰면 언니가 찾으러 올 거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문을 열었다.

복도가 보였다. 텅 빈 복도.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 발짝 내딛었다.

문이 닫혔다.


로비를 지났다. 경비원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여 답했다.

자동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갔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피부 위로 공기의 온도가 내려앉았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렸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근처 호텔을 검색했다. 비즈니스 호텔. 저렴한 곳.

하나를 골랐다. 예약 버튼을 눌렀다.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방은 가벼운데. 발걸음만 무거웠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가는 건지도. 사랑이라서 떠나는 건지, 자격이 없어서 도망치는 건지, 레시피 때문인지 — 전부 맞는 것 같고 전부 거짓말 같았다.

걸었다.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