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32) - 지수

의장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서 수연이 자고 있었다. 고른 숨소리.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무릎을 가슴 쪽으로 웅크린 자세. 세상이 무서운 사람의 잠자리.

창밖으로 송도의 야경이 보였다. 불빛들이 먼 바다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날이 떠올랐다.

사고 당일. 전화를 받았을 때, 병원이라는 단어만 들렸다. 나머지는 다 소음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응급실 복도에 서 있었다.

준우가 죽으면.

그 생각이 스쳤을 때, 슬픔보다 먼저 온 건 공포였다.

나한테 아무도 없다.

엄마도, 아빠도. 준우 말고는 없었다. 이 사람이 죽으면 나는 진짜로 혼자다. 세상에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이 된다.

의사의 가운을 잡았다. 살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

살아만 있으면 됐다. 어떤 모습이든. 내 옆에만 있으면.

수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피부. 긴 속눈썹. 작은 입술.

그때는 안도했다. 살아있으니까.

지금은.

애처로웠다.

김준우. 증권사 차장 후보. 임원 승진이 유력했던 남자. 자신감 넘치고, 목소리 크고, 술자리에서 항상 분위기를 이끌던 사람. 나보다 한 뼘 더 컸고, 어깨가 넓었고, 내가 힘들 때 "내가 다 해줄게"라고 말하던 사람.

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이 처음 들었다. 아니, 처음은 아닐 거다. 하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문장으로 떠오른 건 처음이었다.

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은 증권사 사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낯선 도시의 낯선 침대에서,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눈이 흔들리고, 밖에 나가면 시선이 무서워 고개를 숙인다.

초라했다.

잔인한 단어인 줄 알면서도,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사람을 동등하게 보지 않게 된 것은.

처음에는 남편이었다. 모습이 바뀌어도 남편. 내 짝. 나와 나란히 서는 사람.

어느 순간부터 수연은 내 옆이 아니라 내 아래에 있었다. 내가 안아주고, 내가 달래주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이끈다. 수연은 따라온다. 고개를 끄덕인다. "언니가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한다.

파트너가 아니었다. 보호 대상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이건 사랑일까. 아직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책임감. 의무감. 연민.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이 사람을 볼 때 설레지 않는다는 것.

그게 가장 잔인한 변화였다.


엄마, 아빠, 윌리엄을 생각했다.

세 사람. 내 인생에서 사라진 세 사람. 하지만 사라지기 전에 뭔가를 남긴 사람들.

엄마는 MELAS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가 연구를 시작했다. 엄마의 병을 고치겠다고. 그리고 내 병도. 아빠는 그 연구를 위해 칼릭스를 세웠다. 윌리엄은 아빠가 죽은 뒤에도 그 연구를 이어갔다.

그 회사가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사회의 의장 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병. 아빠의 연구. 윌리엄의 헌신. 모든 것의 끝에 내가 서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 아빠가 남긴 연구를 끝내는 건 나여야 한다.

그리고 이건 수연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MELAS 치료제가 완성되면 나는 안전해진다. 내가 안전해지면 수연을 더 오래 지킬 수 있다.

정말?

정말 수연을 위한 걸까. 이 방에 수연을 두고 나서면서?

생각을 멈췄다. 더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새벽빛이 창문 아래쪽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일어났다. 조용히. 수연을 깨우지 않도록.

옷장을 열었다. 마이클 강이 보내준 쇼핑백. 열어보지 않았었다. 오늘 열었다.

네이비색 재킷. 하얀 블라우스. 잘 재단된 슬랙스. 검은 펌프스.

손끝으로 원단을 만졌다. 울 혼방. 부드럽고 단단한. 비싼 옷이었다. 이 옷을 받아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 스치고 지나갔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오랜만이었다. 서랍에서 파우치를 꺼냈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넉 달간 열어보지 않은 파우치.

베이스를 깔았다.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눈썹을 그렸다. 아이라인을 넣었다. 립스틱. 빨간색과 코랄 사이에서. 빨간색을 골랐다.

거울을 보았다.

2년 전의 나였다. 회사에 다니던 나. 은지수라는 이름표를 단 사람.

재킷을 입었다. 어깨에 딱 맞았다. 펌프스를 신었다. 키가 5센티미터 올라갔다.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어울렸다.

거울 속의 내가 오랜만에 살아있는 것 같았다.

뒤에서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수연이 반쯤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언니...?"

잠에 젖은 목소리.

"어디 가?"

"일하러."

짧게 대답했다. 미소를 지었다.

수연이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덜 깬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심해, 언니."

그 말을 등 뒤로 듣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섰다. 문이 닫혔다.

몸이 가벼워졌다.

복도의 찬 공기가 폐를 채웠다. 어깨가 펴졌다. 시야가 넓어졌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수연 옆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수연을 씻기고, 달래고, 재우고, 일어나고. 그 반복 속에서 줄곧 조여왔던 것이 — 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풀렸다.

미안해.

미안한데, 발이 멈추지 않았다.

그 사실이 죄책감이 되었다. 이 가벼움 자체가 배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차가 연구단지 정문을 통과했다.

마이클 강이 운전석에서 백미러로 나를 힐끗 보았다.

"긴장되세요?"

"아니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늘 이사진은 여섯 분이 참석합니다. 모두 사전에 동의하셨습니다.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형식적. 이 사람이 준비한 것이니까. 이사들을 설득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반대표를 제거하고 — 그런 일들을 이미 끝낸 사람이 형식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능했다. 그게 무서운 거고, 그게 안심이 되는 거였다.

"당신이 앉아야 할 자리에, 당신이 앉는 겁니다."


본관 22층. 이사회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복도가 달랐다. 진한 버건디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발이 푹 빠졌다. 벽에 이 회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멈춰 섰다.

세 번째 사진. 젊은 남자가 흰 가운을 입고 웃고 있었다. 서른쯤 되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의 아빠.

은현철 박사 — 창립 연구이사

목이 메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오늘은 울 날이 아니다.

"가시죠."

내가 먼저 걸었다. 마이클이 반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이사회실 앞. 이중문. 떡갈나무 원목.

마이클이 문에 손을 얹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준비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방이 넓었다.

긴 타원형 테이블. 가죽 의자 열두 개. 천장까지 닿는 통유리 창으로 송도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전 햇살이 테이블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여섯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 한 명은 여성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전원이 일어났다.

"은지수 의장님을 모십니다."

마이클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시선이 나를 향했다.

테이블 상석에 의자가 하나 비어 있었다. 가장 큰 의자. 등받이가 높았다.

그 의자를 향해 걸었다. 내 발소리만 들렸다.

앉았다.

등이 등받이에 닿았다.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느낌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데 몸 안에서 뭔가가 팽창했다. 가슴이 넓어지는 감각. 숨을 깊게 들이마실 수 있는 감각.

2년간 조여왔던 것이 풀렸다.

수연 옆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수연의 손을 잡을 때도, 수연이 웃어줄 때도, 수연이 "언니 고마워"라고 말할 때도. 한 번도.

이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앉으십시오."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낮고, 또렷하고, 흔들리지 않는.

여섯 사람이 앉았다. 일제히.


회의는 형식적이었다. 의장 취임 동의. 만장일치. 주주 권한 위임 확인. 만장일치. 경영 참여 범위 설정. 만장일치.

반대는 없었다. 질문도 없었다. 마이클이 사전에 정리해 놓았을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상관없었다.

서류에 서명했다. 은지수. 세 글자. 볼펜 끝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무게감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의장님."

이사들이 한 명씩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나이 든 남자들의 손. 내 손을 잡을 때 조심스러웠다.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

재밌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조심하고 있다는 것이. 일주일 전만 해도 나는 연구기획팀 직원이었다. 지금은 이 사람들이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게 — 좋았다.

그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져야 했다. 그래야 정상이다. 하지만 서늘함은 오지 않았다. 대신 더 선명해졌다. 이 감각. 이 팽창.


이사들이 나가고, 방에 둘만 남았다.

마이클이 물을 따라주었다.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혔다.

"첫 회의치고 완벽하셨습니다."

"형식적이라며요."

"형식이라도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의장의 존재감입니다."

물을 마셨다. 차가웠다. 명료했다.

"마이클 씨."

"네."

"MELAS 치료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격상시켜주세요. 예산, 인력, 장비. 필요한 건 전부."

빨랐다. 의자에 앉은 지 30분도 안 되어서 첫 번째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내 안의 어딘가에서 이 속도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는 부분이 작았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연구 책임자는 이유진 박사로 지정해주세요."

"이유진 박사요?"

"아버지의 제자이고, T-오가넬 연구의 핵심 인력이에요."

마이클이 끄덕였다.

"좋습니다. 예산은 제가 편성해서 올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 고마움의 성분이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아줘서 고마웠다. 지금은 — 내가 내리는 지시가 즉시 실행된다는 것이 고마웠다. 내 말이 현실이 되는 속도가 고마웠다.

"고마울 것 없습니다."

마이클이 말했다.

"이건 원래 당신의 것이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마이클이 말했다.

"지수 씨."

"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의장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누가 오시나요?"

"둘만의 자리입니다."

수연이 떠올랐다.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연. 오늘 아침에 "조심해"라고 말했던 목소리.

"좋아요."

"일곱 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수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 늦을 것 같아. 먼저 자.]

답장이 바로 왔다.

[알겠어 언니. 조심해.]

조심해. 그 두 글자를 보았다. 아까 아침에도 같은 말을 했다. 수연이 나에게 하는 말은 항상 이것이었다. 조심해. 알겠어. 언니가 알아서 해.

반대가 없었다. 질문도 없었다.

이사회와 같았다.

그 유사성이 떠오른 순간, 화면을 껐다.


저녁. 차가 호텔 앞에 멈췄다.

송도 워터프론트. 40층짜리 유리 건물. 마이클이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로비를 지나 전용 엘리베이터. 38층.

문이 열렸다.

스위트룸이었다. 넓었다. 통유리 창 너머로 송도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테이블에 룸서비스가 세팅되어 있었다. 은색 덮개. 와인 버킷에 담긴 샴페인. 촛불.

장미 한 송이가 냅킨 옆에 놓여 있었다.

이건 축하 파티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둘만의 저녁 식사, 호텔 스위트룸, 샴페인. 이 동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런데도 왔다.

왜?

마이클이 코르크를 땄다. 잔에 거품이 올라왔다.

"오늘 하루가 어떠셨습니까."

잔을 받았다. 마셨다.

"...좋았어요."

"그렇게 보였습니다."

"뭐가요?"

"의자에 앉으셨을 때. 표정이요."

마이클이 창가 소파에 앉았다. 나도 앉았다.

"무슨 표정이었는데요?"

"처음으로 제 자리를 찾은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가슴이 뛰었다. 마이클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 때문이었다. 제 자리. 그 단어가 몸 안의 어딘가를 건드렸다. 아침에 의자에 앉았을 때와 같은 곳을.


스테이크. 랍스터. 트러플 리조또. 과했다. 하지만 맛이 있었다. 연구소에서 먹는 배달 음식, 수연과 마주 앉아 먹는 조용한 식사와는 달랐다. 여기에는 무게가 있었다.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의 식탁 같았다.

자격. 그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와인을 마셨다. 샴페인 다음은 레드 와인. 따뜻한 것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지수 씨."

"네."

"아버지 — 은현철 박사님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잔을 내려놓았다.

"박사님과 함께 일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옳은 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목이 메었다.

"오늘 이사회에서 지수 씨를 보면서 박사님이 떠올랐습니다. 눈빛이. 앉아 있는 자세가. 닮으셨어요."

이 사람은 정확히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게 기술인 건지 진심인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중요한 건 — 구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와인이 반쯤 비었다. 몸이 따뜻했다.

소파에 깊이 앉았다. 구두를 벗었다. 하루 종일 펌프스를 신고 있었으니까.

마이클이 가까이 앉아 있었다. 언제부턴가.

"지수 씨."

"네."

"저도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돌아보았다. 얼굴이 가까웠다.

"저도 외로운 사람입니다. 오랜 시간을. 혼자였습니다."

"처음 지수 씨를 봤을 때 특별하다고 느꼈습니다."

손이 올라왔다. 내 볼에 닿았다.

뜨거웠다.


이러면 안 된다.

알고 있었다. 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 멀었다. 이 방에서, 이 높이에서, 오늘 하루가 남긴 이 팽창감 속에서, 수연의 얼굴이 매우 멀었다.

수연 옆에 있으면 조여왔다. 여기에 있으면 풀렸다. 그 차이가 전부였다. 단순하고, 잔인하고, 부정할 수 없는.

마이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밀어내야 했다.

밀어내지 않았다.

입술이 닿았다.

마이클 때문인지, 와인 때문인지, 이 하루 때문인지 — 구분이 안 됐다.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의자에 앉았을 때 시작된 것이 여기까지 흘러온 것 같았다. 오전의 팽창이 밤의 열기가 되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손이 허리를 감쌌다.

멈추지 않았다.


새벽.

눈이 떠졌다.

낯선 천장. 높았다. 호텔 천장. 커튼 사이로 여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옆에 온기가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마이클이 자고 있었다. 숨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이불 아래로 맨살이 닿았다.

어젯밤이 떠올랐다.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었다.

바닥에 옷이 흩어져 있었다. 내 블라우스. 슬랙스. 속옷.

주워 입었다. 손이 떨렸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화장이 번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목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수연.

그 이름이 머릿속을 쳤다.

수연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밤새. 연락도 없이. 어디 갔냐고 묻지도 않았을 거다. 그냥 기다렸을 거다. 조심해, 라고만 말하고.

눈이 뜨거워졌다.

거울 속의 얼굴. 어제 아침 이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골랐다. 빨간색. 자신 있게. 의장이 될 사람의 얼굴로.

지금은 그 립스틱이 번져서 입가에 자국만 남아 있었다.


침실로 돌아왔다. 마이클이 눈을 떴다.

"일어나셨네요."

"...네."

"아침 먹을까요?"

"아니요. 가봐야 해요."

마이클이 끄덕였다.

"차 불러드릴게요."

"마이클 씨."

"네."

"어젯밤 일은 — "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하지. 실수였다고? 후회한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 정확히 뭘 후회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이클과 잔 걸? 수연을 배신한 걸? 아니면 — 후회한다고 말하면 이 자리가, 이 의자가, 어제 하루의 모든 것이 무효가 될까봐?

그게 더 무서웠다.

"천천히 생각하세요."

마이클이 말했다.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가방을 들었다.

"지수 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하지 마세요."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나갔다. 닫았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택시를 잡았다.

차가 움직였다.

손이 목으로 갔다. 자국이 만져졌다. 코트 깃을 올렸다.

수연은 물어보지 않을 거다. 어디 갔었냐고. 왜 연락 안 했냐고. 물어봐야 할 텐데. 화를 내야 할 텐데. 그래야 정상인데.

물어보지 않을 거다.

그게 편했다.

그 편함이 가장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