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31) - 유진

의심

아침 일찍 수연의 손을 잡고 숙소를 나섰다.

지수에게는 검체 채취를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냉동고에는 이미 수연의 혈액과 조직 샘플이 수십 개나 쌓여 있었고, 당장 추가 채취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진짜로 원했던 건 수연과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연구동으로 향하는 복도는 이른 아침이라 한산했다. 내 뒤를 따라오는 수연의 발소리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옆눈으로 힐끗 살펴보니 역시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창백한 안색, 눈 밑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무언가에 짓눌린 듯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처음 송도에 도착했을 때는 단순한 환경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라고 생각했다. F-72의 고감도 신경 시스템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불안정 상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수연의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구동 3층의 빈 회의실로 수연을 데리고 들어갔다. 문을 닫자 수연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검체 채취... 여기서 하는 거예요?"

"일단 앉아."

내가 맞은편 의자에 먼저 앉자 수연도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회의실 테이블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수연은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연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수연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너 요즘 무슨 일 있는 거지?"

"..."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수연은 한동안 테이블만 응시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수연아."

"정말 없어요, 언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환경이 바뀌어서..."

수연이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입술에만 머물러 있을 뿐 눈까지 닿지 못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는 의도적으로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너 송도 온 첫날부터 이상했어. 로비에서 마이클 강을 처음 봤을 때 움찔하는 거 내가 봤거든. 그리고 그날 두 시간 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건..."

"건물 구경? 바다 구경? 그렇게 오래?"

수연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돌아왔을 때 네 상태를 내가 봤어. 쇼크 직전이었어, 수연아. 단순히 산책하다 온 사람 컨디션이 아니었다고."

나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 얼굴이 어떤지 알아. 너 지금 그 얼굴이야."

수연의 눈이 흔들렸다. 동공이 확장되는 것이 보였다.

수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양손이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말해."

"나한테까지 숨길 거야? 나는 너희 편이야. 지수 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네 편이기도 해."

수연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말하면..."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하면 언니도 나를 싫어하게 될 거예요."

그 말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대체 이 아이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싫어하게 될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수연이 한참 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결국, 수연의 입이 열렸다.

"제주도에서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돌아오기 전날... 뭔가 있었어요."


수연의 고백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제주도의 호텔 라운지 바. 낯선 남자의 접근.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

듣는 동안 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F-71의 감각 수용체가 한계를 넘었을 때 혜인에게 일어났던 일. 눈이 풀리고, 이성이 꺼지고,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그 순간들. 수연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멈출 수가 없었어요."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계속 외쳤는데...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혜인이 했던 말과 거의 같았다. 바디 모델은 달라도 구조는 같으니까.

"그래서 공항에서 쓰러진 거구나."

"네. 뉴럴 쇼크... 언니가 설명해줬던 그거요."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수연은 닦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뭐?"

"송도에 와서... 마이클 강이 저를 찾아왔어요."

"첫날 로비에서 저를 보더니 바로 알아봤어요. F-72라는 걸."

수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어요."

"뭐라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가 어떻게?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 남자... 제주도에서 만난 그 남자가 마이클 강이 보낸 사람인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확실하진 않아요. 근데... 마이클 강이 그 일을 너무 자세히 알고 있었어요. 어떤 호텔이었는지, 몇 시였는지, 심지어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연히 알게 된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계획된 거였을 거예요."

정황상 수연의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확증은 없었다. 마이클 강이 직접 함정을 파놓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정보를 입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상이 있대요. 그날... 그날 밤의 영상이."

수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수 언니한테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혜인이를 지키지 못했던 기억이 올라왔다. 그때도 나는 늦었다. 데이터를 숨기고, 혼자 해결하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수연은 다르게 해야 한다.

"지수한테는 말했어?"

"아니요."

수연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요. 지수 언니한테는... 절대로..."

"왜?"

"영상을 보면... 언니가..."

수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를 떠날 거예요."

나는 수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그 눈이, 순간 김준우의 눈과 겹쳐 보였다. 14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막 결혼한 젊은 남편으로서 지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수줍게 이야기하던 그 눈.

"유진 언니."

수연이 내 손을 꽉 잡았다. F-72의 손은 인간의 손보다 체온이 약간 낮았지만, 그 악력에 담긴 절박함은 분명히 느껴졌다.

"제발 지수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제발요."

"수연아..."

"약속해 주세요. 제발."

나는 잠시 침묵했다. 지수에게 알려야 할까? 아니면 수연의 비밀을 지켜줘야 할까?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당장은 지수한테 말하지 않을게."

수연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대신."

나는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우리가 지수를 도와줘야 해."

"네?"

"지금 지수한테 가서 마이클 강이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해봤자 믿지 않을 거야. 증거가 없으니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목 뒤를 만졌다. 피부 아래 작은 금속 덩어리가 손끝에 닿았다. 칼릭스에서 심어준 임플란트. 생체 신호를 모니터링하는 용도라고 설명을 들었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나도 의심하고 있는 게 있어."

"뭔데요?"

"이 임플란트."

나는 목을 가리켰다.

"비활성화됐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지 모르겠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 이게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 내 위치, 내 대화, 어쩌면 내 생체 데이터까지 전부 마이클 강한테 넘어가고 있을 수도 있어."

수연의 눈이 커졌다.

"증거를 찾아야 해. 나도 찾아볼 테니까, 너도 뭔가 이상한 점이 있으면 기록해둬."

"네..."

"그리고."

나는 수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혹시 마이클 강을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녹음해. 알겠지?"

수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녹음 기능 쓰는 법 알지? 만나기 전에 미리 켜놔. 주머니에 넣어두면 돼."

"네, 알겠어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임플란트가 정말 작동 중이라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말이 전부 마이클 강에게 전송되고 있다는 뜻이다. 아까 수연이 털어놓은 제주도 이야기도. 마이클 강의 협박에 대한 이야기도. 심지어 임플란트를 의심한다는 사실까지.

수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왜 그래요?"

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수연의 눈이 커졌다. 몇 초간의 침묵. 그리고 수연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쳤다. 내가 왜 갑자기 입을 다물었는지 수연도 이해한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근처에 있던 메모지에 휘갈겼다.

[따라와. 말하지 마.]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동 지하 2층.

EMC 테스트룸. 전자기파 적합성 테스트를 위한 완전 차폐 공간이다. 벽면 전체가 구리 메시와 알루미늄 합금으로 코팅되어 있어서 외부로 어떤 전파도 새어나갈 수 없고, 외부에서 어떤 전파도 들어올 수 없다. 연구소에서 민감한 센서 테스트를 할 때 사용하는 방이었다.

출입 카드를 찍고 두꺼운 철문을 열었다. 수연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 잠금 표시등이 녹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여기선 어떤 신호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내가 말했다.

"이제 말해도 돼."

수연이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폐실 내부는 좁고 어두웠다. 형광등 하나가 희미하게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언니, 설마... 아까 한 이야기가 다...?"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어. 임플란트가 작동 중이라면 우리가 나눈 모든 대화가 마이클 강에게 전송됐을 수도 있어."

수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럼... 제주도 이야기도요?"

"응."

"마이클 강의 협박 이야기도?"

"응."

수연이 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그런데..."

수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만약 마이클 강이 다 알고 있다면, 왜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게 나도 걸렸다.

마이클 강이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면, 수연이 자신의 협박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았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였어야 한다. 수연에게 경고를 한다든지, 아니면 더 강한 압박을 가한다든지.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첫째, 임플란트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둘째, 마이클 강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

"아직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그래서 확인해야 해. 임플란트가 정말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어떻게요?"

"스펙트럼 분석기로 내 목 주변 주파수를 스캔하면 알 수 있어. 송신 중이라면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 신호가 잡힐 거야."

나는 차폐실 한쪽에 있는 장비들을 가리키다가 멈췄다.

"잠깐."

"왜요?"

"여기선 안 돼. 차폐실이 모든 신호를 막아버리니까. 임플란트가 송신을 해도 여기선 탐지가 안 돼."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요?"

"문을 열고 테스트해야 해. 잠깐이면 돼."

나는 스펙트럼 분석기의 전원을 켜고 프로브를 목 뒤에 고정했다. 테이프로 임시 고정을 하고 모니터를 수연 쪽으로 돌렸다.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게. 네가 여기서 모니터를 봐. 신호가 잡히면 바로 알려줘."

"알겠어요."

나는 차폐실 문 앞에 섰다.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면 답을 알게 된다. 내 몸에 심어진 이 금속 덩어리가 정말 나를 감시하고 있었는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차폐실 밖으로 한 발 내딛는 순간, 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수연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모니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화면에 선명한 파형이 나타나 있었다. 규칙적인 펄스 신호.

임플란트는 작동 중이었다.

나는 재빨리 차폐실 안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모니터의 파형이 사라졌다.

침묵이 흘렀다.

이제 확실해졌다. 마이클 강은 처음부터 나를 통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언니... 어떡해요."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주도 이야기도, 협박 이야기도, 다..."

"알아."

나는 심호흡을 했다. 패닉에 빠지면 안 된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근데 언니."

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임플란트, 윌리엄이 심은 거 아니에요?"

"맞아."

"그럼 마이클 강은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 거예요? 윌리엄이 알려준 건가요?"

수연도 알고 있었다. 이 임플란트의 정체를. 호텔에서 내가 보여줬었으니까. 혜인이를 살리기 위한 거래였다는 것. 윌리엄이 이걸 통해 지수 아버지를 감시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혜인이가 떠난 후, 윌리엄이 송수신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까지.

"윌리엄이 꺼놨다고 했잖아요."

수연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작동하고 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내가 말했다.

"윌리엄이 거짓말을 한 거거나, 아니면..."

"마이클 강이 다시 켠 거군요."

수연이 내 말을 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두 번째일 거야. 윌리엄이 돌아가시고 나서 마이클 강이 시스템 권한을 가져간 거지. CEO니까 가능했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윌리엄과의 약속이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중요한 건 지금 마이클 강이 이걸 이용하고 있다는 거야. 윌리엄의 의도가 어땠든, 현재 상황은 변하지 않아."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건 기회야."

"기회요?"

"마이클 강은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는 걸 모르잖아. 우리만 알고 있어."

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나는 차폐실 바닥에 앉았다. 수연도 내 맞은편에 앉았다.

"밖에 나가면 연기를 해야 해. 평범하게. 마이클 강이 의심하지 않을 만한 대화만 하고,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만."

"네..."

"그리고 필요하면 가짜 정보를 흘릴 수도 있어. 마이클 강이 듣고 있다는 걸 역이용하는 거야."

"예를 들면요?"

"예를 들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마이클 강이 지수를 완전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우리가 포기한 것처럼 연기하는 거야. '이제 지수 언니는 틀렸어, 우리끼리 떠나자'라고 말하면, 마이클 강은 안심하겠지. 경계를 풀 거야."

"그 틈을 노리는 거군요."

"맞아. 또는 반대로, 가짜 계획을 흘릴 수도 있어. '내일 아침에 서울로 떠나자'라고 말해놓고, 실제로는 다른 행동을 하는 거지. 마이클 강이 헛다리를 짚게 만드는 거야."

수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불안함 대신 뭔가 이해했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수신처 추적. 이 신호가 어디로 전송되는지 알아내야 해. 마이클 강의 서버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 이게 확인되면 불법 감시의 증거가 돼."

"그게 가능해요?"

"쉽지는 않아. 하지만 신호의 패턴을 분석하고, 네트워크 경로를 추적하면 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여기 장비로 가능할 거야."

나는 차폐실 안의 장비들을 둘러보았다.

"증거만 확보하면 마이클 강을 몰아낼 수 있어. 아무리 CEO라도 직원을 불법으로 도청한 건 범죄니까."

수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뭐요?"

"지수한테는 아직 말하면 안 돼."

수연의 얼굴이 굳었다.

"왜요?"

"지수가 지금 마이클 강을 믿고 있잖아. 우리가 이 사실을 말하면 지수가 마이클 강한테 확인하려 들 수도 있어.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게 들통나."

"그럼 지수 언니는 계속 속이는 거예요?"

"증거를 확보하면 그때 전부 보여주는 거야.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증거로. 그래야 지수도 믿을 수 있어."

수연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언니 말대로 할게요."

"좋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너무 오래 있으면 의심받을 수 있어."

수연도 일어섰다.

"밖에 나가면?"

"평범하게. 연구 이야기나 하면서 돌아가자. '오늘 실험 데이터 정리해야 하는데' 같은 거."

수연이 작게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언니, 연기 잘 할 수 있을까요?"

"해야지. 다른 선택지는 없어."

나는 차폐실 문에 손을 얹었다.

"준비됐어?"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었다. 다시 감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