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28) - 수연
협박
새벽.
잠에서 깼다. 방 안이 어두웠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없었다. 연구소 숙소의 창은 작았고, 밖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바다가 가까웠다. 파도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벽이 두꺼운데도.
옆에 지수 언니가 자고 있었다. 숨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들숨. 날숨. 3초 간격. 이불이 어깨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잠결에도 웅크린 자세.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베개 밑에서. 떨림이 귀뼈까지 울렸다. 그래서 깬 거였다.
화면을 켰다. 어둠 속에서 화면빛이 눈을 찔렀다. 밝기를 최대한 낮췄다. 언니 쪽으로 빛이 새지 않도록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위를 덮었다.
발신자: 마이클 강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 기억하십니까?]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화면의 글씨가 흔들렸다. 아니, 손이 떨리는 거였다. 이불 안에서 화면빛이 내 얼굴 위에 하얗게 반사되었다.
제주도. 그날 밤. 화장실에서.
[그 일 때문에 잠시 의논을 하고 싶습니다.]
[연구소 뒤에 승용차를 대기해 놓겠습니다. 타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지. 나만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지수 언니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것을.
"음..."
지수 언니가 뒤척였다. 매트리스가 출렁였다. 화들짝 놀라 휴대전화를 가슴에 숨겼다. 화면이 몸에 눌려 꺼졌다. 갑자기 칠흑이 되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 언니 귀에도 들릴 것 같았다.
언니는 다시 잠들었다. 숨소리가 3초 간격으로 돌아왔다.
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천천히.
등줄기를 땀이 타고 내려갔다. 목덜미에도. 이마에도. 땀방울 하나하나가 피부 위에서 경로를 가졌다. 잠옷이 등에 달라붙었다.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화면 밝기를 최저로 놓고. 글씨가 겨우 보였다.
의논. 협박이겠지.
휴대전화를 껐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페인트 자국이 보였다. 미세한 금이 보였다. 숙소 천장은 서울 아파트와 달랐다. 콘크리트가 드러난 곳이 있었다. 파이프가 지나가는 자리에 보수한 흔적.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
연구소로 향하는 차 안. 유진 언니가 운전하고 있었다. 지수 언니는 조수석에.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안 도로였다. 한쪽은 절벽이고 한쪽은 바다였다. 가드레일이 녹슬어 있었다. 고속도로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수평선에서 솟아오른 해가 바다를 반으로 갈랐다. 햇살의 빨강이 너무 선명해서 눈이 아팠다. 차창에 소금기가 끼어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곳의 흔적.
"수연아, 괜찮아?"
지수 언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린 얼굴. 눈가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응. 괜찮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이 휘어졌다. 자연스럽게. 거짓말하는 법을 아는 얼굴이었다. 김준우는 이렇게 못 했다. 표정이 굳고, 눈을 피했다. 이 얼굴은 달랐다.
차가 커브를 돌았다. 원심력에 몸이 기울었다. 안전벨트가 가슴을 눌렀다.
연구소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바다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소금기와 해초 냄새가 섞인. 연구소 건물은 해안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유리와 콘크리트. 바람이 건물 모서리를 돌며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로비 앞에 그가 서 있었다.
마이클 강.
건물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기둥에서 등을 떼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의 바른 미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부가 서늘해졌다. 공기의 온도가 아니었다. 안쪽에서부터 차가워지는 거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는 다른 한기.
저 얼굴. 저 미소. 나를 보는 저 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눈. 로비의 유리문에 우리 세 사람과 그의 모습이 겹쳐 비쳤다.
지수 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왜 그래? 손이 차가워."
"아니... 그냥 긴장돼서."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방은 좁았다. 싱글 침대 두 개, 작은 책상, 옷장.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지만 3층이라 파도는 보이지 않았다. 수평선만 일직선으로 놓여 있었다. 옷을 걸고, 세면도구를 놓고. 손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칫솔 놓는 위치. 화장품 순서. 머리가 다른 곳에 있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지수 언니가 물었다. 캐리어를 여는 손이 멈추고 이쪽을 봤다.
"그냥... 좀 둘러보고 올게. 답답해서."
언니의 눈을 피했다. 마주볼 수 없었다. 창밖의 수평선을 봤다. 수평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상한 메시지가 왔다고. 무섭다고. 함께 가달라고.
그러면 전부 말해야 했다.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 전부.
방을 나섰다.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한쪽 끝에 비상구 표시등이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뒷문을 열고 나가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짠 냄새가 입술에 달라붙었다. 뒷문 밖은 주차장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금이 가 있었고, 그 사이로 잡초가 올라와 있었다. 바람에 빈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검은 세단이 서 있었다.
주차장 구석. 다른 차들과 떨어진 곳에. 엔진이 걸려 있었다. 배기관에서 하얀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찬 공기 때문에 연기가 오래 떠 있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시동이 걸렸다. 뒷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안에서 가죽 냄새와 히터의 온기가 흘러나왔다.
다리가 떨렸다.
차에 올라탔다. 왜 올라탔는지 — 나중에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가 알고 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문이 닫혔다. 바깥 소리가 차단되었다. 바람 소리도. 파도 소리도. 차 안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그게 오히려 불안했다.
운전석에는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미러 속의 눈이 한 번 나를 보고 돌아갔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갈이 타이어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창밖으로 연구소 건물이 멀어져 갔다. 유리와 콘크리트가 작아지고 있었다. 창문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3층 왼쪽에서 세 번째. 우리 방. 그중 하나에 지수 언니가 서 있을지도 몰랐다.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왼쪽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오른쪽으로 산이 올라갔다. 차는 터널을 하나 지났다. 형광등이 차 안을 스쳐 지나갔다. 밝음, 어둠, 밝음, 어둠.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른 도시가 펼쳐졌다.
고층 건물의 지하 주차장. 콘크리트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다. 조명이 어두웠다. 환풍기가 낮게 울렸다. 타이어 자국이 바닥에 검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이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내 얼굴이 비쳤다. 창백했다. 입술이 하얘져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 층수 표시가 바뀌었다. 3, 7, 12, 18. 귀가 먹먹해졌다.
깔끔한 개인 사무실.
문이 열리자 커피 냄새가 났다. 갓 내린 원두 냄새. 통유리 창으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항구가 보였다. 크레인이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었다. 이 높이에서 보면 장난감 같았다. 사무실 안은 정돈되어 있었다. 가죽 소파, 유리 테이블, 벽에 걸린 추상화 한 점. 책장에 책이 많았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었다. 꽃병에 백합이 꽂혀 있었다. 향이 강했다. 너무 달았다.
마이클 강이 있었다.
"이곳까지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제 개인 오피스입니다."
고개를 숙였다. 예의 바른 자세. 예의 바른 목소리. 눈은 차가웠다. 정장이 다림질이 완벽했다. 넥타이 매듭에 주름 하나 없었다.
"세 분이 계시는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앉으시죠."
소파에 앉았다. 가죽이 차가웠다. 허벅지 뒤쪽으로 차가움이 올라왔다. 소파가 깊어서 등이 뒤로 기울었다. 몸이 빠져드는 느낌. 앉는 사람을 낮추는 소파였다. 맞은편 의자는 더 높았다.
마이클 강이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유리 테이블 위에 커피가 두 잔 놓여 있었다. 내 앞에도 한 잔.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손을 대지 않았다.
침묵.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에서 항구의 크레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와이어가 햇빛에 반짝거렸다.
"제 요청 사항은 간단합니다."
"김수연님이 은지수를 떠나기만 하시면 됩니다."
귀를 의심했다.
떠나라고?
"하지만 은지수 씨는 우리가 만난 사실은 몰라야겠죠?"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가 있었다.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여유로운 동작.
"그러면 제주도 사건도 없던 일이 됩니다."
"향후 김수연님의 바디 메인터넌스도 저희가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바디 메인터넌스. F-72의 유지 보수. 그게 없으면 이 몸은 고장 난다.
"한 가지 더."
손가락을 세웠다. 손톱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100억 돈세탁 사건도 없던 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 사용하시고 남은 코인이 꽤 많으시죠? 그것도 모른 척 해드리겠습니다."
다리를 꼬았다. 날씨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다. 창밖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지나갔다.
입술이 떨렸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살이 찢어지는 감각이 또렷했다. 유리 테이블 위의 커피에서 김이 사라져 있었다. 식은 거였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내가... 안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가까스로 나온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백합 향이 코를 찔렀다. 달고 무거운 향.
마이클 강이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러면 아마..."
천천히 말했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유리에 닿는 소리가 또렷했다.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은지수님께 전달될 겁니다."
지수 언니가 알게 된다.
내가 한 일을.
키스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안 돼.
"지금 결정하시라는 건 아닙니다."
마이클 강이 일어섰다. 정장 단추를 잠그며.
"수연님도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 생각을 좀 해보시기 바랍니다."
에어컨 소리가 들렸다. 천장 어딘가에서 나오는 바람. 창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이 높이까지 올라오는 소리. 마이클 강의 구두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전부 한꺼번에. 눈앞의 윤곽이 흔들렸다. 사무실의 직선들이 — 창틀, 책장, 테이블 모서리 — 전부 물결쳤다. 소파의 질감이 피부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가죽이 허벅지를 태우는 것 같았다.
시야가 좁아졌다. 백합 향이 마지막으로 코를 스쳤다.
정신이 들었다.
소파에 기대어져 있었다.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천장의 다운라이트가 눈 위에 하얀 원을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목덜미를 받치고 있었다. 차가웠다.
눈을 떴다. 마이클 강이었다.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한 손은 목을 부축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향수 냄새가 났다. 시트러스와 나무 냄새가 섞인.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유리 테이블 위에 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아까는 없었던 것.
"괜찮으십니까?"
"뭐... 무슨 일이..."
"뉴럴 쇼크입니다. F-72의 신경 시스템이 과부하가 걸리면 가끔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제주도에서도 그랬다. 바에서. 감각이 폭주해서 뇌가 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돌아가야 해요."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목이 말랐다. 물잔에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마시지 않았다.
"물론이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를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항구의 크레인이 멈춰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져 있었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우리 이야기는 잊지 않으신 걸로 믿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왜 끄덕였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차를 탔던 것 같다. 같은 검은 세단. 같은 가죽 냄새. 같은 무언의 운전사. 연구소 뒤편에 내렸던 것 같다. 주차장의 잡초와 빈 깡통이 아까 그대로였다. 복도를 걸었던 것 같다. 형광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아침과 같은 형광등.
문을 열었다. 지수 언니가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책을 들고 있었지만 펼쳐진 페이지가 아까와 같았다. 읽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갔다 왔어? 어디 아파?"
언니의 눈이 내 얼굴을 훑었다. 걱정 어린 눈빛. 진심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마에 손을 대려 했다. 열이 있는지 보려는 거였다.
"아냐 괜찮아. 그냥 건물, 바다 구경했어.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봐."
창밖만 바라보았다. 바다가 보였다. 아까보다 색이 짙어져 있었다. 오후의 바다. 수평선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다. 움직이는 건지 멈춘 건지 알 수 없었다.
"수연아?"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은 웃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얼굴은 그것마저 자연스럽게 해냈다.
그날 밤.
언니에게 더 매달렸다.
숙소 방의 조명을 모두 껐다. 작은 창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바다 위에 걸린 달이었다. 빛이 침대 위에 비스듬히 떨어졌다.
언니의 몸이 뜨거웠다. 익숙한 온기. 머리카락에서 나는 라벤더 냄새. 언니가 좋아하는 향. 이불 안에서 체온이 섞였다. 내 차가운 발이 언니의 종아리에 닿았다. 언니가 움찔했지만 밀어내지 않았다.
"언니..."
목소리가 떨렸다. 어둠 속에서.
"나 아직 사랑해?"
언니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3초. 5초. 파도 소리가 창을 통해 들려왔다.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
언니의 손을 쥐었다.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손바닥의 온도가 전해졌다. 따뜻했다. 아직 따뜻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깍지 꼈다. 빈틈 없이.
모든 걸 말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말하면 이 온기가 사라질까.
입을 열었다. 닫았다. 이빨이 아랫입술을 눌렀다. 피 맛이 났다.
언니의 숨소리가 들렸다. 잠든 것 같았다. 깊은 수면. 고른 리듬. 3초 간격. 아까와 같은.
나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았다. 달빛이 눈꺼풀 위에 닿아 있었다. 바다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