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27) - 지수

연구소

송도 연구소 입구.

거대한 은색 건물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유리 외벽에 겨울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바람에 금속 냄새가 실려왔다. 차갑고 비릿했다.

차단기가 올라갔다. 유진 언니의 차가 천천히 들어갔다.

로비 앞에 실루엣이 보였다.

마이클 강.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연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어깨가 굳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제 우리 집에 왔을 때도 그랬다. 수연은 마이클 강을 처음 보는 게 아닌 것처럼 반응했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던 그 눈빛.

손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닿았다.

무의식이었다.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하는 사람이 이를 악물지는 않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내부는 차가웠다. 소독약 냄새. 흰색과 은색으로 도배된 공간. 발자국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메아리쳤다. 먼지 하나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무균실.

"이곳이 메인 랩입니다."

마이클 강이 유리문을 열었다. 냉기가 얼굴을 스쳤다.

유진 언니의 눈이 커졌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최신 시퀀서, 질량 분석기, 대형 멸균기들이 도열해 있었다. 안쪽에 fMRI, PET 스캐너.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뇌파 분석 장비."

마이클 강이 언니를 바라보았다. 눈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았다. 장비가 아니라 언니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반응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전부 준비해 뒀습니다."

언니는 홀린 듯 장비들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금속 표면 위를 미끄러졌다. 과학자의 본능이 경계심을 잠시 덮은 것 같았다.

"숙소는 이쪽입니다."

연구동과 이어진 별관. 문을 열자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 대리석 바닥. 가죽 소파에서 새 가구 냄새가 났다. 통유리창 너머로 겨울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잿빛 파도.

"세 분이 지내시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이게 다... 우리 집이라고요?"

수연이 입을 벌렸다.

"감옥치고는 꽤 화려하군요."

내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마이클 강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서 뭔가를 읽으려 했다. 놀람? 불쾌?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어제 우리 집에서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알고 있다던 그 말.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해 주시면 됩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입술의 모양만 바뀌었다.

"물론, 빠르면 더 좋겠죠."


그가 돌아서려 할 때, 나는 물었다.

"어제 하신 말."

마이클 강이 멈췄다.

"아버지를 만난 적 있다고 하셨잖아요. 언제요?"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3초. 묘한 표정이었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마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건가.

"여러 번 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시간이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적응하시는 게 먼저입니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무거운 소리.

오래전부터.

그 말이 목에 걸렸다. 삼켜지지 않았다.


짐을 풀었다. 각자 방을 정하고, 옷을 걸고, 세면도구를 놓았다. 옷걸이가 봉에 부딪히는 소리. 지퍼 소리. 일상은 낯선 공간에서도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수연이 말했다. 옷장에 옷을 걸다 말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어디?"

"그냥... 좀 둘러보고 올게. 답답해서."

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물을 틈도 없이 수연은 방을 나갔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잿빛 파도.

따라가야 하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다음에 — 따라가서 뭘 하려고?

수연이 어디를 가든 수연의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두 시간이 넘었다.

수연이 돌아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없었다. 찬바람을 오래 맞은 사람의 얼굴.

"어디 갔다 왔어?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수연이 외투를 벗었다.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냥 건물, 바다 구경했어.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봐."

평소와 달랐다. 수연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수연아?"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수연이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눈이 따라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물으면 물을수록 수연은 더 닫힐 것이다. 아는데도 참기가 어려웠다.


저녁.

응접실에 모였다. 테이블 위에 배달 음식이 펼쳐져 있었다. 짜장면 냄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유진 언니는 이미 태블릿을 끼고 앉아 있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정리해 보자."

언니가 화면을 띄웠다. 복잡한 화학식과 세포 구조도가 허공에 투사됐다. 푸른 빛이 언니의 얼굴을 비췄다.

"이제 장비가 갖춰졌으니까. 이번 주 안에 수연이 뇌 스캔을 할 거야."

"뇌 스캔이요?"

수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손이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다.

"며칠 전에 발견한 거 기억하지? 수연이 뇌파랑 T-오가넬 활성화 시점이 일치한다는 거. 그게 뭘 의미하는지 확인해야 해."

언니의 설명은 빨랐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날아다녔다.

"내 가설이 맞다면, 수연이 뇌에 레시피 2.0의 핵심이 각인되어 있는 거야. 확인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

"다음 단계요?"

"지수 치료제. 그게 1차 목표야."

치료제. 그 단어가 가슴을 때렸다.

"은 박사님이 왜 F-72에 집착했는지 이제 알겠어."

유진 언니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미토콘드리아 그림이 나타났다.

"MELAS는 세포의 발전소가 꺼진 병이야. T-오가넬은 그 발전소 대신 '외부 배터리'를 연결하는 장치였던 거고."

"그런데 그 배터리가 신경계의 신호를 훔쳐다 쓰니까 뇌가 타버리는 부작용이 생기는 거야. 윌리엄은 그걸 해결하려고 무리수를 뒀고."

"그럼... 방법이 없는 거야?"

"아니, 있어."

언니가 모니터를 두드렸다.

"영생을 포기하면 돼."

"영생?"

"T-오가넬의 텔로미어 복구 시퀀스만 잠그고, ATP 변환 효율을 30%까지만 낮추면 돼. 그럼 '영생약'은 안 되겠지만, 훌륭한 'MELAS 치료제'가 돼."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렸다.

수연이 찻잔을 떨어뜨렸다. 도자기가 바닥에 부딪혀 깨졌다. 찻물이 흰 바닥 위로 퍼져나갔다.

수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그걸 잠그면, 윌리엄이 원하는 건 얻지 못하게 되나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윌리엄은 죽었어. 이제 그 사람이 뭘 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수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안색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왜. 윌리엄이 죽었다는 말에 왜 저러지.

"왜, 수연아? 부작용이라는 말에 왜 그렇게 놀라?"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유진 언니가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은 박사님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거야. 영생이 아니라 치료제. 그게 지수한테 필요한 거니까."

아빠는 영생이 아니라 치료제를 원했다. 윌리엄은 영생을 원했고. 그 충돌이 아빠를 죽게 만든 건가.


"수연아."

유진 언니가 수연을 불렀다. 목소리가 단호했다.

"내일부터 내 연구를 도와줘. 넌 살아있는 샘플이자 데이터베이스야."

"이젠 안 해요."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실험체 노릇, 절대 안 한다고요."

"뭐? 야, 이게, 누굴 위해서 하는 건데!"

"저도 알아요. 지수 언니를 위한 거라는 거. 하지만..."

수연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저도 사람이에요. 마이클 강이 말한 것처럼 '자산'이 아니라고요. 회사 재산이 아니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만."

내 입에서 말이 나왔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오늘은 쉬자. 다들 예민해져 있어."

수연이 나를 보았다. 잠깐. 입을 열었다 닫았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예민해져 있어. 내가 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수연은 예민한 게 아니었다. 자기가 사람이라고 말한 거였다. 정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예민함'으로 닫아버렸다.

왜? 수연의 말이 맞으면 — 유진 언니의 연구가 멈추고, 내 치료제도 멈추니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속이 울렁거렸다.


다음날.

전화가 울렸다.

침대 옆 탁자 위에서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낯선 번호.

"은지수 씨."

낮고 침착한 목소리.

"마이클 강입니다."

"무슨 일이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좋은 소식이 있어서요. 아버님 주식 가압류 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복잡한 얘기라 전화로는 어렵습니다. 제 사무실로 오시겠습니까?"

거절해야 했다. 그 남자와 단둘이 만나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면 되죠?"

말이 나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또 이렇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발은 이미 움직인다. 수연이 나한테 끌려다니던 것처럼, 나는 이 남자한테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 유사성이 불쾌했다.

"연구소 최상층입니다. 안내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전화가 끊겼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15층. 16층. 17층.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창백했다.

18층. 문이 열렸다.

복도가 넓었다.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이 체스판처럼 깔려 있었다. 벽에는 추상화가 걸려 있었다. 푸른색과 회색.

복도 끝에 커다란 문. 문 앞에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은지수 씨?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문이 열렸다.

의외로 단출했다.

통유리창으로 송도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바다가 반짝였다. 하지만 가구는 최소한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둘.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수술실 같았다. 정보를 보여주지 않는 공간. 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읽을 수 없게 설계된 방이었다.

마이클 강이 창가에 서 있었다. 돌아보았다.

"오셨군요. 앉으세요."

나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기획조사팀장이 이런 사무실을 쓰나요?"

마이클 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대답해주세요."

"뭘 말이죠?"

"당신."

한 걸음 다가갔다.

"기획조사팀장이 아니죠? 새로 선임된 CEO 아닙니까?"

마이클 강이 웃었다. 소리 없이.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역시."

그가 창가에서 걸어왔다. 내 앞에 섰다. 올려다봐야 했다.

"이렇게 훌륭한 인재를 모르고 있었다니. 회사의 큰 손실이었군요."

"빈말은 됐고요."

"빈말이 아닙니다."

마이클 강이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잠시 망설이다 앉았다. 가죽이 차가웠다. 마이클 강이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위에 갈색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아버님 주식 건부터 말씀드리죠."

그가 봉투를 밀었다.

"가압류 해제 서류입니다. 제가 처리했습니다."

봉투를 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법원 도장. 붉은 잉크. 진짜 같았다.

"왜요?"

"왜라니요?"

"왜 이런 걸 해주는 거죠? 대가가 뭔데요?"

마이클 강이 미소 지었다. 온화해 보이는 미소.

"대가라."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본능적으로 등을 의자에 붙였다.

"은지수 씨.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뜸을 들였다.

"이사회는 아버님의 평생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예상 밖이었다. 협박이 아니라 감사?

"전임 윌리엄 대표는..."

마이클 강이 말을 골랐다.

"아버님을 내보내고 싶어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개인적인 이유로."

개인적인 이유.

그 말에 뭔가 스쳤다. 엄마. 아빠. 윌리엄. 셋의 관계.

"하지만 현 이사회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습니다."

마이클 강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따님이 회사에 계시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이사회는 아버님의 연구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 강이 몸을 뒤로 젖혔다. 여유로운 자세.

"은지수 씨를 이사회 멤버로 추대하고 싶어합니다."

"...네?"

이사회 멤버?

"농담이시죠?"

"농담이 아닙니다."

마이클 강이 서류 봉투를 두드렸다.

"가압류를 풀고, 상속 문제를 해결해서, 은지수 씨를 이 회사의 최대 주주로 선임할 계획입니다."

"최대 주주요?"

"네. 전임 윌리엄 대표의 횡령 사건으로 그 가족의 지분 축소가 불가피해졌습니다. 그 지분을 은지수 씨에게 돌리려는 겁니다."

최대 주주. 이사회 멤버. 아빠의 연구.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왜요?"

"왜라니요?"

"왜 저한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거죠? 저는 그냥 연구기획팀 직원이에요. 아버지가 여기서 일했다고 해서 갑자기 최대 주주가 된다?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됩니다. 은지수 씨."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버님은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셨습니다. T-오가넬의 핵심 기술은 전부 아버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윌리엄은 돈을 댔을 뿐이죠."

"..."

"그 기술의 정당한 상속자는 은지수 씨입니다. 이사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햇살이 수면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내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물론이죠."

마이클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마이클 강이 말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됐군요."

"그럼 저는..."

"함께 식사하시죠. 계속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거절하려 했다. 입이 열렸다.

"...알겠습니다."

왜 거절을 못 하지.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 사람이 만들어놓은 동선 위를 걷고 있다는 감각. 수연에게 "이건 너를 위한 거야"라고 말하면서 내가 정한 길 위를 걷게 하던 것과 — 같은 구조 아닌가.

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쾌했지만, 붙잡아두지는 않았다.


레스토랑은 송도의 고급 호텔 꼭대기에 있었다.

프렌치 레스토랑.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웨이터가 와인을 따랐다. 코스 요리가 하나씩 나왔다.

포크가 접시를 긁었다. 음식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이클 강은 여유롭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맛이 없으신가요?"

"아니요. 맛있어요."

거짓말이었다. 마이클 강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디저트가 나왔다. 초콜릿 무스. 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마이클 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계속 하실 말씀이 뭐죠?"

마이클 강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상했다. 여유롭던 얼굴에 뭔가 다른 게 스쳤다.

"사실은..."

마이클 강이 말을 더듬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처음 뵈었을 때.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뭐라고?

"장례식장에서 처음 뵈었을 때. 슬픔에 잠긴 모습이... 아름다우셨습니다."

마이클 강이 나를 바라보았다.

포크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저는 남편이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비록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그 사람은 내 남편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해요."

마이클 강이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

"아름다우시군요. 그런 모습도."

"마이클 강 씨."

"네."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사업 제안은 생각해볼게요. 하지만 이건..."

"알겠습니다."

마이클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디저트가 녹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 초콜릿이 접시 위로 퍼져나갔다.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차를 불러드릴까요?"

"괜찮아요. 걸어갈게요."

마이클 강이 일어섰다. 손을 내밀었다. 악수했다.

"오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제가 실수를 했지만."

"생각해볼게요. 이사회 건."

"네."

"그리고..."

마이클 강이 말했다.

"김수연 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손을 뺐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폐를 채웠다. 보도블록이 구두 밑에서 단단했다. 바람이 코트 사이로 파고들었다.

왜 수연의 이름을 아는 거지.

수연은 이 회사의 '자산'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그걸 마지막에 던진 방식이었다. 고백을 거절당한 직후에. 악수를 하면서.

그게 뭐였지. 경고? 거래 조건? 아니면 — 내가 수연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인지 시험한 건가.

걸으면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악수했던 손이 아직 따뜻했다. 그 온기가 거슬렸다.

수연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사회 제안은 해야 한다. 마이클 강의 고백은 — 말하면 뭐가 달라지지. 수연이 불안해할 뿐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겠다는 거지.

보호인가. 숨기는 건가.

연구소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색 유리가 오후 햇살에 번쩍였다.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