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26) - 유진

복귀

밤이 깊었다.

실험실에서 키보드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집요한 타건음. 유진 언니는 또 밤을 새울 모양이었다. 저 사람은 언제 자는 걸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 틈으로 송도의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수연의 체온이 옆에서 느껴졌다. 따뜻하고, 고요했다.

"언니."

"응."

"박사님이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오래된 질문이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어렸을 때는 아빠를 미워했어."

말이 저절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는 이상하게 말이 쉬웠다.

"평일에는 주로 아줌마랑 지냈거든. 아빠는 늘 연구소에 있었어."

기억이 떠올랐다. 텅 빈 집. 저녁 여섯 시의 식탁. 혼자 앉아 밥을 먹던 날들.

"주말에만 아빠를 만났어. 그것도 연구소에서."

"연구소에서?"

"응. 아빠 실험실 구석에 내 자리가 있었어. 작은 책상이랑 의자. 거기서 그림 그리고, 책 읽고. 그게 나한테는 놀이터였어."

약품 냄새가 났던 그 방. 아빠의 흰 가운. 현미경에 눈을 대고 있던 뒷모습.

수연이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가끔 윌리엄 아저씨가 왔어."

"윌리엄이?"

"응. 미국에서 올 때마다 우리 연구소에 들렀거든. 아저씨는 늘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했어. 올 때마다 선물을 가져왔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때는 윌리엄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빠는 맨날 현미경만 들여다보고, 아저씨는 나랑 놀아줬으니까."

"그랬어?"

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철없었지."


한참 침묵이 흘렀다.

"박사님은."

수연의 목소리가 낮았다.

"언제나 네 생각뿐이었어. 네가 얼마나 엄마를 닮았는지. 웃는 모습이, 말투가, 고집 부리는 것까지."

수연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눈이 빛났다.

"제발 병이 발병하지 않아야 할 텐데. 늘 그 말씀을 하셨어."

가슴이 조여왔다. 아빠. 그 사람은 평생을 그 걱정만 하며 살았던 건가.

"박사님은 연구실에서 네 사진을 봤어. 내가 처음 연구소에 갔을 때, 박사님 책상에 네 사진이 있었어. 고등학교 졸업 사진. 액자가 닳아 있었어. 매일 만졌나 봐."

"그 사진..."

기억났다. 졸업식 날 아빠가 찍어준 사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열여덟 살의 나.

"박사님이 말씀하셨어. 내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숨이 막혔다. 그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다. 아빠는 그런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수연한테 고마웠다. 내가 모르던 아빠의 모습을 들려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아팠다. 딸인 내가 모르는 아빠를, 남편이었던 수연이 알고 있다는 게. 아빠의 마지막 몇 년을 곁에서 본 건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었다.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 없이. 베개가 젖어갔다.

수연이 나를 안았다. 품이 따뜻했다. 샴푸 향이 났다.

"내가 있잖아. 내가 널 지켜줄게."

고개를 들었다. 수연의 얼굴이 가까웠다.

입술이 닿았다.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커튼 사이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간만에 푹 잔 것 같았다.

수연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내 팔을 베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잠든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실험실 쪽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났다. 유진 언니가 밤을 꼬박 샜나 보다.

수연이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이 천천히 나를 찾았다.

"일어났어?"

"응. 배고파."

"일어나. 뭐 해줄게."

이불을 걷었다. 햇살이 방 안 가득 쏟아졌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날카로운 소리였다. 평화가 깨지는 소리.


세 사람이 현관 앞에 모였다.

유진 언니는 밤새 연구했는지 눈 밑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수연은 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모니터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마이클 강. 지난번 호텔 로비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인터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윌리엄 박사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윌리엄이.

죽었다고?

손이 멈췄다. 모니터를 잡으려던 손이.

어젯밤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이 침대에 누워서 윌리엄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선물을 가져오던 아저씨. 내가 엄마를 닮았다고 하던 아저씨.

그 사람이 죽었다고.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고, 이제 윌리엄마저. 아빠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들어가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유진 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 돼. 저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단호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절대 들이면 안 돼. 우리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던 거야."

"언니."

내가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만나봤는데,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

"지수야, 너 순진한 거야. 그 사람들이 서혜인에게 뭘 했는지 알잖아."

수연이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

작은 목소리였다.

"봐. 수연이도 무서워하잖아."

"하지만 윌리엄이 죽었다면... 뭔가 바뀌었을 수도 있어."

"바뀌었으면 뭐가 달라? 칼릭스는 칼릭스야."

침묵이 흘렀다. 인터폰 화면 속에서 마이클 강이 시계를 확인했다.

"수연아."

언니가 수연을 쳐다보았다.

"네 생각은?"

수연이 내 옷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한참을 망설였다.

"...지수 언니가 옆에 있으면."

그게 대답이었다.

언니가 눈을 감았다. 3초. 다시 떴다.

"알았어. 들어오라고 하자."

내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마이클 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키가 컸다. 180은 넘어 보였다. 정장 차림.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봤지?

유진 언니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나와 수연을 등 뒤에 두려는 것 같았다.

"걱정 마세요. 혼자 왔습니다."

마이클 강이 내 시선을 알아채고 말했다.

"앉아도 될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개의치 않고 소파에 앉았다.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죠?"

유진 언니가 물었다.

"어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신 것 같더군요. 경찰에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래층 사무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소란을 피웠다고."

어젯밤이 떠올랐다. 옥상에서 소리 지르던 우리. 그때는 해방감에 취해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제가 전직 경찰입니다. 친구들이 좀 있습니다."

전직 경찰. 칼릭스 같은 대기업에서 전직 경찰을 기획조사팀에 두는 건 흔한 일인가?

"그 보다는... 중요한 이야기는 이겁니다."


"최근 회사는 윌리엄 박사님의 횡령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횡령. 그 단어에 방 안 공기가 달라졌다.

"대규모 자금이 역외를 통해 빠져나간 흔적이 있었고, 그 자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클 강의 시선이 유진 언니에게 고정되었다.

"조사하던 중 윌리엄 박사는 이미 수개월 전에 사망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수개월 전. 그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건 최근 일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리고 자금은 지금 이곳 송도에 있는 닥터 윌리엄의 개인 연구소에 투입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언니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서 제가 마침 송도에 와 있었고, 주변 친구들에게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이게 제가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에어컨 소리만 웅웅거렸다.

이 사람은 모르는 게 없군.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사회의 결정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이사회요?"

"이사회는 이유진 박사님께 윌리엄 박사가 하고 있던 연구를 계속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언니의 눈이 커졌다.

"저한테요?"

"네.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은현철 박사의 연구와 윌리엄 박사의 연구 결과물입니다. F-72. 김수연 님입니다."

자산.

그 단어가 귀를 때렸다. 뒤에서 수연의 손이 내 옷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자산이라고. 수연이. 내 사람이. 이 사람한테는 연구 결과물이고 회사 재산이라고.

주먹을 쥐었다. 뭔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면 감정이 터질 것 같아서 참았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마이클 강이 언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이유진 박사님뿐이라고 이사회는 판단했습니다."

"윌리엄 박사님이 비록 횡령이라는 방법으로 연구를 개인화하려 했지만... 이사회에서는 그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회사의 미래를 위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가 나를 힐끗 보았다. 아니, 나를 지나 수연을 보았다.

"그래서 이유진 박사님께 연구를 계속하는 대신... 100억 원의 무기명 채권에 대한 문제는 눈감아 드리기로 했습니다."

100억.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돈 내가 제일 많이 썻는데 쇼핑하느라.

눈감아 드리기로 했다는 마이클 강의 말이, 호의가 아니라 협박처럼 들렸다.

"연구 시설은 이곳 송도에 있고, 최신 시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박사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이클 강이 명함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윌리엄은 어떻게 죽었죠?"

"이곳 송도의 개인 연구실에서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언가를 삼키는 것 같았다. 놀라지 않는 사람의 얼굴.

"시신은요?"

"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가족들에게 인계됐고요.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고 들었습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 주세요. 우리가 의논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이클 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작 하나하나가 느긋했다.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이 방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이 저 남자라는 게 소름 끼쳤다. 우리는 숨어 살고, 쫓기고, 떨고 있는데 — 저 사람은 산책하다 들른 것처럼 여유롭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아섰다.

"아,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나에게 멈췄다.

"은지수 씨."

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아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입을 열려 했다. 언제요. 어디서요.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어요.

하지만 그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그 말을 남기고 나갔다. 마치 미끼를 던져놓고 가는 것처럼.

문이 닫혔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하아..."

유진 언니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연도 내 옆에 앉았다.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밖은 여전히 밝았다. 평범한 오후였다. 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머릿속에서 마이클 강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아버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왜 마지막에 그 말을 한 거지. 왜 하필 나가면서. 저건 계산된 거다. 내가 쫓아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말.

그리고 아까부터 걸리는 기시감. 저 사람의 눈매. 어딘가에서 분명히 본 적 있다.

"언니."

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람... 믿어도 되는 거야?"

유진 언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아."

"무슨 말이에요?"

"며칠 전에 발견한 거 기억하지? 수연이 뇌가 T-오가넬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거. 뇌파랑 T-오가넬 활성화 시점이 일치한다는 거."

기억났다. 유진 언니가 보여줬던 그래프. 수연의 뇌에 레시피 2.0이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그게 사실이라면, 수연이 뇌 안에 레시피 2.0의 핵심이 들어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장비로는 거기까지밖에 못 봐. 확인하려면 더 정밀한 뇌파 분석 장비가 필요해. fMRI, PET 스캔... 여기엔 그런 게 없어."

"그러니까 받아들이자는 거예요?"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함정일 수도 있어. 나도 알아. 근데 함정인 줄 알면서 들어가는 거랑, 레시피 2.0을 해독할 기회를 놓치는 거랑. 어느 쪽이 나쁜 건지 모르겠어."

"언니..."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 나를 자산이라고 불렀어. 회사 재산이래. 나는 그냥... 연구 결과물이래."

수연의 눈이 젖어 있었다.

나는 수연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런 거 아니야. 저 사람이 뭐라고 부르든, 넌 내 남편이야."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가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니."

내가 입을 열었다.

"마이클 강이 마지막에 한 말... 아버지 이야기. 언니는 뭔가 아는 거 있어?"

유진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뭔가 스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은현철 박사님과 윌리엄이 동료였다는 것 외에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테라스에 모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송도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갔다.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결정해야 해."

유진 언니가 입을 열었다.

"칼릭스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침묵이 흘렀다.

"받아들이면 뭐가 좋아지는데요?"

수연이 물었다.

"수연이 뇌에 레시피 2.0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 그리고 그걸 해독할 수 있으면... 지수 치료제도 만들 수 있고, 수연이 몸도 안정시킬 수 있어. 모든 답이 거기 있어."

"나쁜 점은요?"

"칼릭스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언니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거부하면... 여기 장비로는 뇌 분석에 한계가 있어. 가설만 세워놓고 확인을 못 하는 거야."

"그럼 결론은 정해진 거네요."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들어가야 해요. 칼릭스로."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각오가 되어 있어?"

"수연이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수연이 내 손을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갈게. 언니들이 가면 나도 가."

유진 언니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송도의 야경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좋아. 그럼 내일 연락하자. 마이클 강한테."

결정이 내려졌다.

우리는 다시 호랑이 굴로 들어가기로 했다. 아빠의 연구가 시작된 곳으로.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송도의 밤바람. 차가웠다.

나는 수연의 손을 꼭 잡았다.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도시의 불빛이 전부 삼켜버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