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25) - 지수
전환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둑해진 뒤였다.
호텔 방의 암막 커튼 틈으로 검푸른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려다가 멈췄다. 어젯밤에 빼놓은 것이 기억났다. 추적당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벗어놓으라는 유진 언니의 지시였다.
"일어나야 해."
유진 언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 한 마디가 신호탄이 되었다. 우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언제 흘린 식은땀인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 핸드폰, 신용카드, 심지어 입고 온 옷까지. 위치 추적기가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 몰라."
유진 언니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증거 인멸' 작업을 시작했다. 핸드폰을 껐다. 유진 언니는 망설임 없이 유심 칩을 빼내 반으로 꺾어버렸다. 작은 금속 조각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기기는 욕조 물속에 던져버렸다. 화면이 한 번 깜빡이더니 꺼졌다.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이클 강의 명함이 코트 주머니에 있었다. 직통 번호. 버리지 않았다. 유진 언니 모르게 속옷 안쪽에 접어 넣었다.
"비트코인 지갑 번호? 내 머릿속에 있어."
수연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100억.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자 생명줄. 그게 진짜 저 안에 들어 있는 걸까.
오후 6시 12분. 직원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 끝에서 청소 카트를 끌고 오는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등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유진 언니가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지나갔다. 마치 당연히 여기 있어야 할 사람처럼.
"고개 숙여. 자연스럽게."
언니가 속삭였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언니의 뒤를 따랐다. 수연이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내 것인지 수연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식자재 창고를 지났다. 냉동고에서 차갑고 비린 공기가 흘러나왔다. 쓰레기 처리장을 가로질렀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상구를 밀어 여는 순간, 찬 바람과 함께 썩은 음식물과 기름때와 담배꽁초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화려한 스위트룸에서 쓰레기장 뒷골목으로. 불과 몇 분 만에 벌어진 추락이었다.
골목은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 유진 언니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분 후에 와."
우리는 벽에 등을 붙이고 기다렸다. 2분이 20분처럼 느껴졌다. 골목 입구로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칠 때마다 숨을 멈췄다.
그때 낡은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예약해 둔 콜택시가 골목 어귀에 멈춰 섰다. 낡은 개인택시, 운전석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기사. 디지털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가장 안전한 도주 수단이었다.
"송도로 가주세요."
택시 안에는 오래된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가죽 시트가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놓은 것이 보였다. 창밖으로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송도. 유진 언니가 확보한 연구실. 언니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거다. 어젯밤에 생각한 세 번째 선택지는 — 아직 없다.
거대한 오피스 타워 앞에서 택시가 멈췄다.
"여기야. 내 예전 동료가 차렸던 바이오 벤처 회사야. 시리즈 B 투자에 실패해서 문 닫은 지 좀 됐어.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이라 비어 있거든."
화물용 승강기가 삐걱거리며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인을 잃은 책상들과 먼지 쌓인 실험 기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설비는 갖춰져 있었다. 현미경, 배양기, 각종 실험도구, 그리고 데이터 서버실까지.
"일단 여기라면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잠자리는 직원 휴게실 겸 당직실이었다. 2층 침대 두 개와 소파 하나. 침대에 앉자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이불에서 습기 찬 냄새가 났다. 오래 방치된 냄새.
"아니, 내 머릿속에 100억이 있는데... 이게 뭐야."
수연이 투덜거렸다.
유진 언니가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려왔다. 인스턴트였지만 따뜻했다. 우리는 낡은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스프링이 꺼져서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 것 같았다.
창가에 서 있던 유진 언니가 말했다.
"보인다."
우리는 통유리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호수공원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송도의 마천루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불안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송도에서의 생활은 기묘한 평화와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공존했다.
유진 언니는 도착하자마자 다시 하얀 가운을 입었다. 낡은 벤처 사무실의 먼지를 털어내고, 방치된 실험 기구들을 닦아내는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도망자의 것이 아니었다.
"수연아, 이리 와 봐. 샘플 좀 채취하자."
시작은 가벼웠다. 구강 상피 세포. 면봉으로 입 안쪽을 긁어내는 정도.
하지만 유진 언니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대범해졌다.
"팔 걷어. 혈액 50cc만 뽑을게."
"언니, 어제도 뽑았잖아. 나 빈혈 걸리겠어."
"엄살 피우지 마. 텔로미어 수치 변화 확인해야 돼."
"지수 네 샘플도 필요해."
"나는 왜?"
"대조군."
바늘이 팔에 들어갔다. 따끔한 느낌. 피가 튜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검붉은 색.
구강 세포에서 혈액으로. 뇌파 측정도 시작됐다. 혜인의 감각 데이터를 기록했고, 수연의 감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했고, 이제 혈액과 뇌파까지. 유진 언니가 수연에 대해 모으고 있는 데이터의 양이 매일 늘어나고 있었다.
수연은 투덜거릴지언정 거부하진 못했다. 자신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게 유진 언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저녁 무렵, 수연과 나는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붉은 석양이 송도 센트럴파크의 수로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며칠간의 실험과 채취로 수연의 피부는 창백했고, 눈 밑은 퀭했다.
"좋다..."
수연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언니, 뉴질랜드 가봤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왜?"
"거기에 가면... 키위라는 새가 있대."
"키위? 과일 키위 말고?"
"응. 과일 키위랑 털 색깔도 비슷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겼대. 근데... 날개가 없어."
수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는 날 수 있었는데, 천적이 없는 섬에서 너무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다 보니까 날개가 퇴화했대. 날 필요가 없어진 거지. 그래서 땅 위를 뒤뚱뒤뚱 걸어 다니기만 해."
"날지 못하는 새는 많잖아. 펭귄도 있고, 타조도 있고."
"그렇지... 근데 왠지 나 같아서."
수연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렇잖아. 겉모습은 완벽한 여자인데... 진짜 여자는 아니야. 그렇다고 남자도 아니지. 날개가 있는데 날 수 없는 새처럼, 여자의 몸을 가졌는데... 그냥 흉내만 내는 존재."
그녀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언니."
"응."
"언젠가 우리 뉴질랜드에 가자. 거기 가서 키위새를 보고 싶어."
"......"
"나 같은 돌연변이도 친구가 필요하잖아. 어때?"
그녀가 애써 밝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녀린 어깨가 내 품 안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가자. 다 정리되면... 꼭 가자."
"약속했다?"
"응. 약속할게."
열흘째 되던 날. 유진 언니가 우리를 실험실로 불렀다.
"이것 좀 봐."
그녀가 노트북 화면을 돌려 보여주었다. 복잡한 그래프와 수치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T-오가넬 활성 패턴이야. 위에가 F-71, 아래가 수연이."
두 개의 그래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위쪽 그래프는 날카로운 톱니 모양으로 들쭉날쭉했다. 아래쪽은 부드러운 파도처럼 규칙적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F-71의 T-오가넬은 면역계의 공격을 받으면서 불규칙하게 반응했어. 이식 후 이틀째부터 급격히 감소했고. 그런데 수연이는..."
"늘어나고 있어요?"
"늘어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복제하고 있어. 면역 거부 반응은 제로에 가깝고."
유진 언니가 화면을 스크롤했다. 또 다른 그래프가 나타났다.
"근데 이상한 건 이거야."
그녀의 손가락이 파형의 특정 지점을 짚었다.
"T-오가넬 복제 패턴이 무작위가 아니야. 봐. 여기, 여기, 여기. 일정한 주기로 활성화되고, 일정한 주기로 휴지기에 들어가."
주기적 패턴. 무작위가 아니라면 — 뭔가가 제어하고 있다는 뜻이다.
"뇌파도 같이 봤어요?"
유진 언니가 나를 봤다. 잠깐 멈칫한 뒤 — 다른 창을 열었다.
"이건 정상인의 알파파, 베타파 패턴이야. 그리고 이건..."
녹색 선이 나타났다.
"수연이의 뇌파."
녹색 선은 다른 패턴과 확연히 달랐다. 중간중간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튀어나와 있었다.
유진 언니가 두 그래프를 겹쳐 놓았다.
"T-오가넬 활성화 시점과 뇌파 스파이크 발생 시점이야."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수연이의 뇌가 T-오가넬을 컨트롤하고 있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뇌에서 신호가 나가면, T-오가넬이 반응하는 거야."
"이 뇌파 데이터는 언제 측정한 거예요?"
"수연이 잠들어 있을 때. 수면 중이 노이즈가 적거든."
수연이 자는 동안에. 수연이 모르는 사이에.
"F-71에서는 이런 패턴이 없었어. 혜인이의 T-오가넬은 그냥... 몸 안에서 제멋대로 증식하다가 면역계에 공격받아 죽어갔지. 뇌와의 연동 같은 건 관찰된 적 없어."
"그럼 수연이만 다른 거예요?"
"레시피 2.0이 다른 거지."
언니가 몸을 일으켜 수연을 바라보았다.
"1.0은 T-오가넬을 몸에 이식하는 기술이었어. 하지만 2.0은... 뇌가 T-오가넬을 통제하도록 설계된 것 같아. 뇌 신경망과 T-오가넬 사이에 인터페이스가 있는 거야."
"인터페이스가 어디에..."
"수연이 뇌에 있겠지. 뉴런의 특정 배열, 시냅스 연결 패턴... 그 자체가 T-오가넬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인 거야. 하드웨어에 각인된 소프트웨어처럼."
수연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 프로그램이 깔려 있다는 거야?"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레시피 2.0의 핵심 알고리즘. 박사님이 네 뇌에 심어 놓은 거야. 아마 본인도 모르게."
"본인도 모르게 어떻게..."
"대화, 교육, 반복적인 사고 패턴 유도... 방법은 많아. 신경가소성을 이용하면 특정 뉴런 회로를 강화하거나 새로 만들 수 있거든."
수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박사님이... 나한테 그런 짓을 했다고?"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널 보호하려고 한 거겠지. 네 뇌에 레시피를 숨겨두면, 칼릭스가 함부로 널 해칠 수 없으니까. 레시피가 손상될 테니까."
또 보호. 아버지도 보호한다면서 말하지 않았고, 칼릭스도 보호한다면서 추적하고, 유진 언니도 보호한다면서 — 잠든 수연의 뇌파를 측정한다.
수연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수연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
"언니도 그랬잖아. 네 뇌에 뭐가 있든, 너는 온전한 하나의 사람이라고."
유진 언니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겼다.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지금 수연에게 필요한 말이니까.
수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근데... 이제 어떡해?"
유진 언니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일단 더 분석해야 해. 뇌파 패턴을 더 정밀하게 읽어서, 어떤 신호가 어떤 반응을 유도하는지 맵핑해야 해. 그게 레시피 2.0을 해독하는 첫 단계야."
"해독하면... 뭐가 달라져요?"
"수연이 몸의 비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언니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걸 무기로 쓸 수 있어. 칼릭스와 협상하든, 세상에 공개하든. 우리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거야."
그 데이터를 유진 언니 혼자 쥐게 되는 거다. 레시피 2.0의 해독본을. 지금도 실험 데이터는 언니의 노트북에만 있다. 서버실이 있지만 나는 접근 권한이 없다.
그날 밤, 나는 수연과 유진 언니를 불러 모았다.
"회식하자."
"뭐?"
"회식. 삼겹살 먹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그냥 미친 척하고 놀자."
유진 언니가 피식 웃었다.
"갑자기 왜?"
"왜긴. 우리 여기 온 지 열흘째인데, 맨날 실험하고 걱정하고 울고... 이러다 다 미쳐. 오늘 하루만 쉬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 나 삼겹살 먹고 싶었어."
한 시간 후, 삭막했던 벤처 사무실은 연기와 고기 냄새로 가득 찼다.
퀵서비스로 공수한 삼겹살과 목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갔다. 기름이 튀고, 육즙이 흘러내렸다. 소주병이 하나씩 비워졌다.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K-pop이 흘러나왔다.
"마셔. 오늘 죽는 거야."
나는 두 사람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두 사람도, 알코올이 들어가자 서서히 빗장이 풀렸다.
"유진 언니, 솔직히 말해봐. 나 찔러볼 때 쾌감 느끼지?"
"미친년. 아파할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 줄 알아?"
"근데 왜 자꾸 굵은 바늘만 써?"
수연의 취중 진담에 유진 언니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며칠 만에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노래가 바뀌었다. 수연이 벌떡 일어났다.
"이 노래 알아! 춤춰야 해!"
"여기서?"
"여기 아니면 어디서!"
수연이 실험대 사이를 누비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엉망이었다. 박자도 안 맞고, 동작도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웃겼다.
"나도!"
유진 언니가 가운을 벗어던지고 수연 옆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나도 합류했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처럼 뛰고, 돌고, 소리를 질렀다. 땀이 났다. 숨이 찼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며칠간 쌓인 것들이 땀과 함께 빠져나갔다.
머리는 안 꺼졌다. 유진 언니의 노트북에 저장된 데이터, 서버실의 접근 권한, 마이클 강의 명함이 속옷 안쪽에 접혀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 어딘가에서 계속 돌고 있었다. 하지만 수연이 웃고 있었다. 그게 지금은 더 중요했다.
"옥상 가자!"
수연이 갑자기 외쳤다.
"뭐?"
"옥상! 소리 지르고 싶어!"
우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다리로 비상계단을 올랐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이 맨발에 닿았다. 싸늘한 감촉이 짜릿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옥상 문을 박차고 나갔다.
송도의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발아래로는 호수가 검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머리 위로는 쏟아질 듯한 별무리가 있었다. 찬 바람이 훅 끼쳐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수연이 옥상 난간 끝으로 달려갔다.
"야이 나쁜 놈들아!! 나 여기 있거든!!"
수연의 외침이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듣고 있어?! 잡으려면 잡아봐!! 난 안 무서워!!"
유진 언니도 난간으로 달려갔다.
"우리 여기 있다아!!"
나는 난간에 기대어 두 사람을 봤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고.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이 살아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소리를 다 지르고 나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쳤다, 우리..."
"완전 미쳤어..."
수연이 헐떡이며 돌아섰다. 찬 바람에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의 여왕님을 위하여."
내가 옥상 난간에 기대어 건배 제의를 하는 시늉을 했다.
수연이 눈물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여왕은 무슨... 나 그냥 실험용 쥐인데."
유진 언니가 수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넌 우리의 열쇠야.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킬 사람이야."
열쇠. 유진 언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레시피 챕터에서 수연이 "나는 USB 메모리예요?"라고 물었을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열쇠는 USB보다 나은 건가.
나도 수연의 다른 쪽 어깨를 안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부축하며 사무실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화장은 번지고, 옷은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밤이 깊어갔다. 송도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우리는 좁은 휴게실에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연이 중간에, 나와 유진 언니가 양옆에. 천장에 금이 가 있었다. 물 얼룩도 보였다.
"언니들."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응."
"내 머릿속에 뭐가 있든... 나 무섭지 않아. 너희가 있으니까."
나는 수연의 손을 잡았다. 유진 언니도 다른 쪽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우리도."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수연이 먼저 잠들었다. 유진 언니도 곧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