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24) - 지수

레시피

나와 수연은 동시에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트렌치코트 자락이 보였다.

"언니!"

수연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유진 언니였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언니! 흑... 살아 있었구나. 난 또 잡혀간 줄 알고..."

수연이 유진 언니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너희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유진 언니가 당황한 듯 수연을 토닥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언니의 얼굴을 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진짜 모르는 건지.

"언니가 없는 동안 손님이 왔었어요."

"손님?"

"칼릭스요. 마이클 강이라는 사람이 로비에서 우리를 만나고 갔어요."

순간, 유진 언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정함이 사라지고,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그자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위치 추적을 했대요. 우리를 해치러 온 건 아니라고 했어요. 안전한지 확인만 하고 갔다고."

나는 마이클 강이 했던 말들을 하나하나 전했다. 은현철 박사의 유지를 받들었다는 것, 남편을 살리기 위해 F-72 바디를 구해줬다는 것, 의사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우리를 보호하고 싶다는 것.

전하면서 언니의 반응을 봤다. 어디서 표정이 바뀌는지.

내 말이 이어질수록 유진 언니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잠깐. 의사한테 비밀로 했다고?"

"네. 회사가 관여한 걸 알면 오해가 생길까 봐 그랬대요."

유진 언니가 피식 웃었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웃음이었다.

"전형적인 수법이야. 진실을 반만 말하고, 나머지 반은 가리는 거지. 의사한테 비밀로 한 건 사실일 거야. 하지만 이유가 다르지. 오해가 생길까 봐가 아니라, 그 수술의 진짜 내용이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야."

"은현철 박사의 유지? 박사님은 이미 칼릭스와 등을 진 상태였어. 칼릭스에 뭔가를 부탁할 처지가 아니었다고. F-72 바디를 구해줬다? 그건 맞아. 하지만 호의가 아니라 투자야. 살아있는 F-72 샘플이 필요했으니까."

마이클 강의 말을 하나씩 뒤집고 있었다. 빠르게. 막힘없이. 마치 미리 답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그 사람이 하나 더 말했어요."

"뭘?"

"언니가 곧 돌아올 거라고요. 확신에 차서."

언니의 손이 멈췄다.

"언니 연락이 안 됐어요. 전화도, 문자도. 그런데 그 사람은 언니가 올 시간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언니를 봤다. 떨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침묵이 흘렀다. 수연도 놀란 눈으로 유진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놈들이 날 감시하고 있으니까."

유진 언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 차에 GPS를 달아놨을 거야. 내가 서울로 진입하는 걸 감지하고, 내가 도착하기 전에 너희를 먼저 만나 흔들어놓은 거지. 나를 의심하게 만들어서,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수작이야."

답이 빨랐다. 1초도 안 걸렸다.

"차에 GPS가 있었으면 — 가평 세이프 하우스에 갔을 때도 추적당했겠네요."

언니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

"......그래. 아마 그랬겠지."

"세이프 하우스가 털린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어요?"

"가능성은 있어."

"그러면 언니는 그걸 왜 지금까지 몰랐어요?"

짧은 침묵.

"......솔직히, 놓쳤어. 내 실수야."

인정했다. 하지만 — GPS를 미처 체크하지 못한 사람과, GPS가 있다는 걸 이제야 떠올린 사람은 다르다.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른다.

"차는 버려야겠어. 다른 교통편을 써야 해."

언니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쨌든 놈들이 위치를 알았으니 여긴 끝이야. 빨리 짐 싸."

"잠깐요."

"뭐?"

"마이클 강이 언급 안 한 게 있어요. 레시피 2.0이요. 집을 뒤지고 하드디스크를 가져간 건 그걸 찾기 위해서잖아요. 근데 한마디도 안 했어요."

"......"

"언니는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니가 나를 봤다. 시선이 길었다.

"그 얘기를 하려면 앉아야 해."


유진 언니가 소파에 앉았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

"......"

"내가 왜 이렇게까지 너희를 돕는지, 정확히 말하면 왜 F-72를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지."

그녀의 시선이 수연에게 고정되었다.

"수연이, 너 때문이야."

"저, 저요?"

수연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혹시 나한테서 혜인 언니를 보는 거예요?"

수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같은 F 시리즈 바디니까? 나를 혜인 언니 대용품으로..."

"그런 게 아니야."

유진 언니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너는 혜인이의 대용품이 아니야. 절대로."

"그럼 뭔데요!"

"네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그것 때문이야."

대용품이 아니라고 해놓고 — 수연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라고. 그 차이가 수연에게는 없을 것이다.

"F-72를 F-72답게 만드는 핵심. 칼릭스가 찾아 헤매는 '레시피 2.0'이 네 뇌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몰라."

"레시피 2.0?"

"T-오가넬은 알지? 텔로미어를 수복하는 세포 소기관. 그건 레시피 1.0의 산물이야. 혜인한테 쓴 것도 그거였고."

"레시피 1.0이면... F-71에 쓴 거?"

"응. 하지만 불완전했어. T-오가넬이 텔로미어를 고치긴 하는데, 면역 체계가 이물질로 인식해서 공격하거든. 거부반응이야."

"레시피 2.0은 그 문제를 해결한 거라는 거죠."

내가 끼어들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T-오가넬의 진화형. 텔로미어 수복을 넘어서 세포의 시간 자체를 되돌리는 기술이야. 면역 체계가 공격하지 않도록 세포막의 항원 표지를 완벽하게 위장하는 기술까지 포함돼 있을 거야."

"수연이 몸이 거부반응 없이 살아있는 게 — 레시피 2.0이 적용된 결과?"

"그렇게 생각해."

수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이 레시피가 완전히 해독되면, 누구든 이런 바디를 만들 수 있게 돼. 의식만 이식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을. 칼릭스가 미쳐 날뛰는 이유도 그거야."

"그 정보를 어디서 알았어요?"

내가 물었다. 언니가 멈칫했다.

"뭘?"

"레시피 2.0의 원리. 칼릭스 서버에 데이터가 없다는 것. 뉴런 각인이 가능하다는 것. 이걸 언니가 어떻게 아는 건지."

언니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도 연구자야. 박사님 옆에서 10년을 일했어. 레시피 2.0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1.0의 한계와 F-72의 결과를 놓고 역추론하면 윤곽은 잡혀. 칼릭스 서버에 데이터가 없다는 건 — 내가 퇴사할 때 확인했어. 접근 권한이 있었으니까."

"뉴런 각인은요?"

"그건 가설이야. 확실한 건 아니야."

가설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확신에 차서 설명하다가 — 질문을 받으니 가설이 됐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추측인지의 경계가 흐려.

"가설이라고 치고. 그러면 아버지가 준우에게 레시피를 각인시켰을 수 있다는 것도 가설이에요?"

"시점이 겹쳐. 박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던 연구가 사라졌고, 그 시점은 준우가 연구소에 드나들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해."

"시점이 겹치는 것과 각인은 다르잖아요."

"......맞아. 하지만 박사님은 준우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셨어."

언니가 말을 이었다.

"그 명석함, 냉철한 분석력. 연구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거렸지. 과학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박사님은 그렇게 믿으셨어."

"그러다 어느 날, 박사님이 나를 부르셨어. '유진아, 내 딸 지수 알지? 좋은 사람 좀 만났으면 하는데...' 그러시면서 준우 얘기를 꺼내셨지."

아빠가 직접 준우를 소개해 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연구를 지키기 위한 포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 —

"박사님은 직접 자리를 마련하셨어. 연구소 근처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친 척하자고 하셨지만, 다 계획된 거였어."

계획. 이 단어가 걸렸다.

아버지가 준우를 소개해 준 건 사실이다. 내 걱정을 했다는 것도 —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유진 언니의 맥락에 놓으면 이건 다르게 읽힌다. 아버지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유산을 맡겼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순수했는지 계산이었는지 — 둘 다였을 수도 있다. 그게 더 나빠.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원하면서 동시에 그 결혼을 안전장치로 쓸 수 있는 위치에 준우를 놓은 거니까.

"결과적으로 박사님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유산을 맡긴 꼴이 됐어."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말이 언니 입에서 나왔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박사님은 정말 좋은 분이셨어. 프로젝트나 비밀에 대해선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어. 우린 그저 경제 전망이나 기술의 미래 같은 걸 이야기했을 뿐이야."

"네 기억은 그렇겠지."

언니가 말했다.

"하지만 뇌 이식 수술 과정에서 기억이 조작되거나 삭제되었다면?"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수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는 뭐예요? 그냥... 데이터를 담는 그릇이에요?"

수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수연의 손을 잡았다.

"내 몸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비밀이 내 뇌 속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건데!"

수연이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호흡이 가빨라지고 있었다.

"아까 로비에서 머릿속이 하얘졌던 것도 그거 때문이에요? 그 레시피라는 게 내 뇌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니에요?"

"아니야. 레시피가 너를 해치는 건 아니야. 네 뇌 속에 잠들어 있는 것뿐이야. 아까 셧다운은 F-72의 감각 과부하 때문이야. 별개의 문제야."

언니가 수연의 어깨를 잡았다.

"레시피가 있든 없든, 너는 온전한 하나의 사람이야."

방금 레시피 때문에 수연을 지킨다고 해놓고 그 말이 나온다. 수연이 그걸 믿을까.

수연의 눈을 봤다. 안 믿고 있었다. 하지만 믿고 싶어하고 있었다.

"난 원해서 이 몸에 온 것도 아니에요. 누가 나한테 물어봤어요? 이제는 그게 이유가 돼서 쫓기고 도망치고... 나 때문에 다들 이러는 거잖아. 차라리 나만 없으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수연아."

이름을 불렀다. 크지 않게.

수연이 없으면 해결되는가. 레시피가 수연 뇌에 있다면 — 수연이 없으면 레시피도 사라진다. 칼릭스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수연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고. 수연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방패인 셈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 수연을 사람이 아니라 자산으로 만든다. 내 머릿속에서도.

"그런 소리 하지 마."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수연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가 들먹거렸다.

유진 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연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끝까지 들어."


"놈들이 왜 혜인이를 그토록 집요하게 회수해 갔을 것 같아?"

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혜인이 뇌에도 레시피의 조각이 각인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데려갔어."

"바디뿐만 아니라 뇌까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부품처럼 해부했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놈들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혜인이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유진 언니의 목 뒤가 떠올랐다.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수술 흔적. 피부 밑의 이물감.

혜인의 바디를 해부했다고 했다. 레시피의 조각을 찾기 위해. 그리고 유진 언니의 목 뒤에도 누군가에게 시술받은 흔적이 있다. 유진 언니는 혜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칼릭스가 혜인에게서 아무것도 못 찾았다면 — 혜인의 곁에 있던 사람을 다음으로 의심하지 않았을까.

묻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더 신중한 거야."

언니가 이를 악물었다.

"우리를 당장 잡아가지 않는 이유도 그거야. 섣불리 건드렸다가 손상되거나, 영영 찾지 못하게 될까 봐. 레시피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지. '보호'라는 가면을 쓰고."

수연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를 안았다.

유진 언니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추궁당할 때마다 혜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헤드셋에 대해 물었더니 혜인의 감각 데이터로. 오늘은 정보의 출처를 물었더니 혜인의 해부로. 진심이 아니라는 게 아니다. 진심이겠지. 하지만 — 질문이 멈추는 건 사실이다. 언니가 울면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한다.

의도적인 건지 무의식인 건지.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그럼... 우린 어떡해요?"

수연이 물었다.

"일단 쉬어. 오늘은 너무 늦었어. 놈들도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거야."

언니가 수연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일 송도로 가자. 거기서 다음을 생각하자."

그렇게 말하고 언니는 방으로 들어갔다.

수연도 지쳐서 침대로 갔다. 약을 먹이고 이불을 덮어줬다.

나만 남았다.

둘 다 같은 말을 한다. 아버지의 유지. F-72의 보호. 같은 단어인데 뜻이 다르다.

마이클 강은 레시피를 한마디도 안 했다. 유진 언니는 목 뒤의 흉터를 한마디도 안 했다. 두 사람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유진 언니는 몸으로 우리를 지켜줬다. 그건 사실이다.

송도. 언니가 확보한 연구실. 거기로 가면 언니의 영역이다. 서울에 남으면 칼릭스의 영역이고.

어느 쪽에도 나만의 바닥이 없다.

아버지가 남긴 것. 유진 언니도 모르고, 칼릭스도 모르는 것. 그런 게 있긴 한 건지.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