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23) - 지수

마이클강

오전 10시.

유진 언니가 가방을 챙겼다.

"송도에 다녀올게. 친구가 운영하던 바이오 스타트업이 문을 닫았는데, 연구실을 빌릴 수 있을지 확인해 보려고."

"얼마나 걸려요?"

"저녁 전에는 돌아올 거야. 호텔에서 나가지 말고 기다려."

언니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덧붙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모르는 사람이 오면 절대 문 열지 마."

문이 닫혔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

수연과 나, 둘만 남았다.


시간이 늘어졌다.

TV를 켰다가 껐다. 수연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울 도심의 빌딩들이 회색빛으로 늘어서 있었다.

오후 1시 23분.

"악!"

욕실에 다녀오던 수연이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놀라서 돌아보니, 수연이 현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밀려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이거... 이거 봐요..."

수연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짧은 편지와 명함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명함을 보았다.

[ Calyx 기획조사팀 팀장 마이클 강 (Michael Kang) ]

칼릭스.

편지는 간결하고 정중했다.

[ 잠시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대화. 로비. 기다리겠다.

강제가 아니라 요청이었다. 들이닥치려면 진작 들이닥쳤을 것이다. 문을 따고 들어오는 건 이 사람들한테 일도 아니니까. 그런데 명함을 남기고 로비에서 기다린다.

"어떡해... 어떡해요, 언니? 칼릭스가 왔어요."

수연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수연의 움직임이 멈췄다.

"수연아?"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얘."

"뭐?"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생각도 안 나."

수연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소의 날카로움이 사라지고,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숫자가... 안 보여. 계산을 해야 하는데... 방법이 안 떠올라. 왜지?"

그녀가 눈을 떴다. 동공이 풀려 있었다.

"무서워. 근데... 무섭다는 생각도 희미해져.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뉴럴 댐퍼. 가방을 열었다. 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하얀색 정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수연아, 입 벌려."

수연의 혀 위에 약을 올렸다. 유진 언니가 하던 것처럼. 물을 떠다 입에 대주었다.

30초. 1분. 수연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 미안. 갑자기 멍해졌어. 왜 그랬지?"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근데 방금 뭔가 이상했어. 뇌가 꺼지는 느낌이었어. 컴퓨터가 과열돼서 강제 종료되는 것처럼."

수연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몸... 너무 무서워."

약 잔량을 세었다. 아홉 알. 오늘 하나를 썼으니까. 유진 언니가 없으면 아홉 알이 전부다.


"수연아, 나 내려가 볼게."

"뭐? 언니 미쳤어?"

"로비는 공공장소야. 사람도 많고 CCTV도 있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유진 언니가 없는 지금, 칼릭스에 대한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마이클 강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유진 언니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레시피 2.0에 대해 언급하는지.

"여기서 기다려. 문 잠그고 아무한테도 열지 마."

"싫어. 나도 갈 거야."

"수연아 —"

"혼자 두고 가지 마."

수연의 눈이 젖어 있었다. 방금 뇌가 꺼진 사람이었다. 혼자 둘 수 없었다.

"......알겠어. 같이 가자. 대신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었다.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고쳤다. 어깨를 펴고, 턱을 들었다.


로비.

호텔 로비는 평화로웠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체크아웃을 하는 여행객들. 그 일상적인 풍경 속에 이질적인 존재가 하나 있었다.

로비 중앙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

30대 중반. 건장한 체격에 몸에 딱 맞는 맞춤 양복. 우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환한 미소.

의장실에서 내가 입었던 재킷을 보내준 사람. 의장석에 앉아서 이사회를 진행한 날.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다가가자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칼릭스 기획조사팀의 마이클 강입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위압감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없앤 것이다.

"앉으시죠. 서서 이야기하기엔 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소파에 앉았다. 수연을 안쪽에 앉히고 내가 바깥쪽.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세 잔이 놓여 있었다. 세 잔. 수연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커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두 분, 걱정돼서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이클 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집에 갔더니 안 계시더군요. 문짝에 청테이프가 붙어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혹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신 건 아닌가 하고요."

청테이프. 그 집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지. 놀랐다는 건가. 아니면 확인하러 간 건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경찰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은지수 씨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좀 했죠. 긴급 상황이라고 판단했거든요."

경찰을 통한 위치 추적. 칼릭스의 기획조사팀이 경찰에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레벨. 회사의 대외 영향력이 내가 알던 것보다 깊다.

"저희를 왜 찾으시는 거죠?"

"두 분은 저희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마이클 강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돌아가신 연구소장님의 특별한 부탁도 있었고... 무엇보다 지금도 은지수 씨는 우리 회사의 대주주이십니다. 저희가 특별히, 아주 예전부터 안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주주. 맞다. 아버지의 지분이 나한테 있다. 가압류 상태이긴 하지만.

"안전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하셨는데."

목소리를 낮게 유지했다.

"그 관심이 우리 집 도어록을 부수고 하드디스크를 가져가는 형태인가요?"

마이클 강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커피잔을 내려놓는 손이 0.5초 멈췄다.

"가압류 건이나 보안 관련 사안은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저는 경영지원팀이 아니라 기획조사팀 소속이라서요. 제 관심사는 오직 두 분의 '신변 안전'뿐입니다."

선을 그었다. 기획조사팀. 자기 관할이 아닌 건 답하지 않겠다는 것. 능숙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제가 딱 한 번의 실수로 남편분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을... 통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편. 김준우.

수연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경호 실패라고 포장했다. 그러면 — 사고 이전부터 김준우를 경호하고 있었다는 뜻인가. 대주주의 남편이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

"그때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사고 이전부터 남편을 경호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마이클 강이 잠시 멈췄다.

"네. 연구소장님의 유족은 모두 저희 보호 대상이었습니다."

보호 대상. 내가 몰랐던 보호. 아버지가 말하지 않은 보호. 또 같은 패턴이다. 보호한다면서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않는.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수습은 했습니다만..."

마이클 강이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수연의 얼굴에서 잠시 멈추고 지나갔다.

"지금 이 여성분의 바디는 저희가 제공해 드린 겁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은 달랐다. 칼릭스가 F-72를 "제공"했다. 선물처럼 말하고 있다.

"저도 어렵게, 정말 어렵게 구했습니다. 프로젝트가 폐기 직전이라 남은 재고가 거의 없었거든요. 은현철 박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사위분인 김준우 씨를 살리고 싶었는데..."

그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사실... 담당 의사분께 이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희 회사가 이런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괜한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요."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점은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사과. 이 사람이 사과하고 있다. 매끄럽게. 자연스럽게. 앞뒤가 맞게.

그리고 앞뒤가 맞았다. 준우가 사고를 당했을 때, 병원에서 수술에 대한 설명이 모호했던 것. 의사가 질문을 회피하듯 했던 것. 그때의 위화감이 마이클 강의 설명에 맞춰지고 있었다.

유진 언니는 준우의 사고가 설계된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은 경호 실패라고 한다. 앞뒤가 맞는 건 — 둘 다였다. 어느 쪽도 지금 여기서 깨뜨릴 수 없었다. 더 들어야 한다.

"죄송합니다. 급하게 구하다 보니 여성 바디밖에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 여성 바디밖에 없어서 — 김준우를 여자의 몸에 넣었다고.

"거듭 사과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성별이 바뀌어 혼란스러우셨겠지만...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마이클 강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사과했다.

수연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내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

"가능하면 너무 멀리 가지 마시고 서울에 계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저희가 두 분의 안전을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이유진 씨는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유진 언니의 이름. 유진 언니가 송도에 갔다는 건 우리밖에 모른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금방 돌아온다"고 안다. 유진 언니의 행선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거나 — 유진 언니와 접점이 있다는 뜻이다.

"유진 언니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시죠?"

"저는 제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습니다."

선을 그었다. 다시. 답할 것과 답하지 않을 것을 미리 구분해 놓은 사람의 방식.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무새를 단정히 고치며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오늘 두 분의 안전만 확인하면 됩니다."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더 꺼내 내 앞에 놓았다.

"제 개인 직통 번호입니다. 혹시 어려운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유진 씨는 저희 칼릭스가 두 분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건 오해입니다."

"칼릭스는 두 분을 해치거나 위협을 가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F-72... 아니, 김수연 씨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F-72라고 했다가 김수연으로 고쳤다. 이 사람에게 수연은 먼저 F-72이고, 그다음에 김수연이다.

그는 수연에게 정중히 목례를 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그가 몸을 돌려 로비 출구 쪽으로 향했다.

"잠깐만요."

뒤를 쫓지는 않았다. 제자리에서 말했다.

"한 가지만 더요. 아까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다고 하셨는데 —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뭘 부탁하셨나요?"

마이클 강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잠깐이지만 — 내 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었다.

"딸을 지켜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회전문 밖으로 사라졌다.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그를 태우고 떠났다.


방으로 돌아왔다.

"언니, 저 사람 말... 믿어도 될까요?"

수연이 소파에 웅크리며 물었다.

믿느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마이클 강이 한 말 중에서 확인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리해야 했다.

마이클 강이 한 말을 하나씩 되짚었다. 내가 대주주라는 건 사실이다. 준우 수술 당시 병원 설명이 이상했던 것도. 여성 바디밖에 없었다는 말도 —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유진 언니의 위치를 어떻게 아는지는 답하지 않았다. "딸을 지켜달라"가 아버지의 진짜 말인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하나 — 마이클 강이 말하지 않은 것. 레시피 2.0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을 뒤져서 하드디스크를 가져간 건 레시피를 찾기 위해서인데. 이 사람이 레시피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건 — 꺼내지 않은 것이다. 일부러.

"모르겠어. 아직은."

수연에게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유진 언니가 어디 있는지를 저 사람이 알고 있어. 언니의 행동이 추적당하고 있거나, 아니면 — "

말을 끊었다. 아니면 유진 언니와 칼릭스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연결이 있거나. 목 뒤의 흉터가 떠올랐다. 하지만 수연에게 말할 단계가 아니었다.

"아니면 뭐요?"

"아직 모르겠어."

테이블 위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마이클 강. 직통 번호. 이걸 쓸 일이 올까.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오기를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시간이 흘렀다.

10분, 20분, 1시간.

마이클 강의 말대로라면 유진 언니는 곧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현관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수연이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때였다.

띠리링-

경쾌한 도어락 소리가 정적을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