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21) - 지수

흔적

새벽 2시.

유진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연은 기다리다 지쳐 먼저 잠들었고, 나는 뒤척이다가 새벽 어스름이 창가에 내려앉을 무렵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꿈결인 줄 알았다. 욕실 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샤워기 물줄기 소리가 멈추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자욱한 수증기와 함께 유진 언니가 걸어 나왔다.

돌아왔다. 쪽지 한 장 남기고 사라진 지 스물네 시간 만에.

내가 깬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빛을 받은 뒷모습.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피로만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다녀온 사람의 긴장이 풀리는 방식이었다.

언니는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케이스를 열고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희미한 LED 불빛이 관자놀이 부근에서 파랗게 점멸했다.

헤드셋을 쓸 때 — 머리카락을 올리는 손이 목 뒤를 스쳤다.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손가락이 목덜미의 한 지점을 누르듯 만졌다가 지나갔다. 습관처럼.

"후으... 혜인... 아..."

언니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혜인. F-71.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댄 언니의 얼굴이 이완되어 있었다. 고통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는 표정. 무언가를 다시 느끼고 있는 사람의 얼굴.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로 다가갔다. 언니가 황급히 헤드셋을 벗어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지수...?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좀 됐어요."

언니가 고개를 떨구었다. 깊은 한숨.

"미안해. 깨울 생각은 없었어."

"그거 뭐예요?"

헤드셋을 가리켰다. 은색으로 빛나는 매끄러운 디자인.

"신세틱 링크. 감각 신경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캡처해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송하는 장치."

감각 신호 전송. T-오가넬이 포획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에너지.

"송수신만 하는 게 아니야. 기록하고 재생하는 것도 가능해."

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혜인과 함께한 순간들... 내가 전부 기록해뒀거든. 그녀의 체온, 심장 박동, 떨림까지... 전부 다."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병적인 거 알아. 죽은 사람의 데이터를 붙잡고... 하지만 지수야. 잊을 수가 없어. 이 데이터는 영원히 선명하니까. 매번 접속할 때마다 그녀가 살아있는 것 같아서."

진심이었다. 떨리는 목소리, 젖은 눈. 연기는 아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같이 돌았다. 혜인의 감각 데이터를 기록했다. F-71의 신경계가 느낀 모든 것을. 그리고 지금 수연이 바로 옆 방에서 자고 있다. F-72. 같은 계열의 바디. 더 진보된 버전.

유진 언니가 수연의 감각 데이터도 기록하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혜인을 잃었으니까. 혜인의 데이터로는 부족해지는 날이 올 테니까.

"......저도 비슷한 게 있어요."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준우의 음성 메시지. "지수야, 오늘 저녁 뭐 먹을까?" 수백 번도 더 들은 그 평범한 한마디. 지우지 못한 것. 하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내 약점을 보여줄 단계가 아니다.

언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더 묻고 싶은 눈이었다. 하지만 나도 묻지 않았고, 언니도 묻지 않았다.


"보여줄 게 있어."

언니가 몸을 일으켰다. 눈물을 닦으며 표정이 다시 단단해졌다. 전환이 빨랐다. 탁자 위의 가죽 가방을 가리켰다.

"늦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요?"

"응. 가평에 다녀왔어. 세이프 하우스에."

가평. 혼자서. 연락도 없이.

"확인해야 했어. 닥터 윌리엄이 정말로 정리를 시작했는지."

"그래서요?"

"텅 비어 있었어. 완전히."

언니가 눈을 감았다.

"배양 탱크가 있던 자리엔 먼지만 남아 있었어. 데이터 서버, 시약 냉장고, 현미경들... 전부 사라졌어. 바닥엔 장비를 끌어낸 자국만."

장비 회수. 흔적 제거. 칼릭스가 세이프 하우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유진 언니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곳이 안전하지 않았다. 그러면 유진 언니가 모르는 것이 더 있을 수 있다.

"다행히 내가 찾으러 간 건 아직 그대로였어."

언니가 가방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무기명 채권. 은 박사님이 비밀 칸에 숨겨둔 거야. 칼릭스 놈들은 몰랐던 것 같아."

봉투를 열었다. 채권 다발. 발행처와 시리얼 넘버를 훑었다.

"이걸 현금화하려면 금융권에 내밀어야 하는데 — 채권 번호가 추적되면 위치가 노출돼요."

"그래서 고민이야."

"수연이가 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말하고 나서 멈칫했다. 수연의 능력을 꺼내 드는 것. 침입 챕터에서 느꼈던 그 불편함. 수연을 도구로 내미는 것 같은. 하지만 지금은 선택지가 없었다.


아침.

수연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녀의 눈빛이 잠깐 우리 사이를 훑었다.

"...뭐야, 분위기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물었다. 예리한 눈동자.

"유진 언니가 가평에 다녀왔어. 이걸 가지고."

봉투를 밀었다. 설명은 짧게 했다. 수연이 봉투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커졌다.

"무기명 채권? 이게... 얼마짜리예요?"

"100억 정도."

수연이 채권 다발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추적 없이 현금화할 수 있어?"

내가 물었다. 수연의 눈빛이 바뀌었다. 집중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던 사람의 눈.

노트북을 켜고 화면을 띄웠다. 휴대용 스펙트럼 분석기를 연결하고 채권 한 장을 센서 위에 올렸다.

삐빅.

시리얼 넘버와 발행 정보가 화면에 떴다.

"100억을 종이로 들고 움직이는 건 위치 노출이나 다름없어요. 딥웹의 OTC 고스트 풀에 올리면, 추적을 피하고 싶은 익명의 고래들이 사줘요. 우리는 비트코인을 받고."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수천 개의 믹싱 계좌로 자금을 잘게 쪼개어 전 세계 서버로 흩뿌리는 과정.

나는 화면의 숫자를 같이 읽었다. 믹싱 경로의 분산 패턴. 수수료 구조. 컨펌까지 걸리는 시간. 준우가 하던 영역이었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건 가능했다. 수연이 설계하고 내가 검증하는 구조. 이쪽이 맞다.

"여기 — 세 번째 경유지에서 풀이 얕아. 단일 노드 의존도가 높으면 추적 가능성이 올라가."

수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잠깐 놀란 눈.

"......맞아. 경로 하나 더 뚫을게."

수연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테이블 위의 호텔 볼펜을 집어 무심하게 입에 물었다.

준우의 버릇. 복잡한 수식을 풀거나, 중요한 딜을 앞두고 초조할 때면 늘 하던 행동.

수연의 손이 멈췄다. 입에 문 볼펜을 내려다보더니, 마치 뜨거운 것을 만진 것처럼 탁 내려놓았다.

"......이상해."

자신의 손을 펴서 바라보았다.

"뭐가?"

"방금 자판을 칠 때, 이 손가락들이 제멋대로 움직였어. 내가 시킨 게 아닌데. 뇌가 시킨 거야. 김준우의 뇌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여기 안에... 김준우가 아직 있어. 죽었는데. 그 남자는 분명히 죽었는데. 왜 아직 여기서 숨 쉬고 있지?"

나는 수연의 손을 잡았다.

"수연아..."

"아까 트레이딩할 때, 너무 재밌었어. 손가락이 춤추는 것 같았어. 그게... 그게 너무 익숙했어. 근데 그건 내 기억이 아니야."

가슴을 움켜쥐었다.

"수연으로 살고 싶은데... 왜 자꾸 그 남자가 나오지?"

나는 수연을 끌어안았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넌 수연이야"라고 말하면 — 방금 수연의 뇌가 해낸 일을 부정하는 거다. "준우의 기억이 있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면 — 수연이라는 사람을 준우의 그릇으로 만드는 거다. 어떤 말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기만 했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이 정적을 깼다.

"컨펌 완료."

수연이 눈물을 닦았다. 마지막 클릭.

화면에 'Complete' 메시지가 떴다.

수연은 채권 뭉치를 집어 들었다. 망설임 없이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지이이잉-

100억 원어치의 종이가 잘게 썰려 나갔다.

"현재 시세로 약 100억. 추적당하지 않는 우리 돈이에요."


유진 언니가 스마트폰을 뒤적거렸다.

"이 호텔 스파가 좋아 보이는데? 너희들 피곤하지 않니?"

쉬자는 말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언니가 가방에서 신세틱 링크 케이스를 꺼내는 걸 보고 답을 알았다.

"수연이가 메인 호스트가 되는 거야. F-72의 감각 신경에서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이 송신기가 캡처해서, 나와 지수의 뇌로 실시간 전송하는 방식이지."

수연의 감각 데이터를 수신하겠다는 거다. 새벽에 혜인의 데이터를 재생하던 사람이 — 이번에는 수연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기록도 되는 거죠?"

내가 물었다. 언니의 눈이 잠깐 멈췄다.

"......가능은 해. 하지만 오늘은 모니터링 목적이야. 수연이 몸의 감각 반응 패턴을 확인하려고."

모니터링. 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새벽에 본 게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수연의 몸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30층. 마사지 룸.

세 개의 베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기하던 마사지사들에게 유진 언니가 손을 저었다.

"우리끼리 할 거니까."

문이 닫혔다.

송신용 헤드셋이 수연의 머리에 씌워졌다. 수신기를 나와 언니가 착용했다.

딩-

연결되는 순간 — 감각의 경계가 흔들렸다. 수연의 심장 박동이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녀의 피부 감각이 내 피부 위에 겹쳐졌다.

유진 언니가 오일을 수연의 등에 떨어뜨리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손가락이 척추를 타고 내려가며 근육의 뭉침을 풀었다. 언니의 손이 닿는 곳마다 수연의 감각이 링크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나는 그 감각을 받으면서 동시에 관찰했다. 수연의 반응 강도. 어깨와 목 주변에서 감각 신호가 유독 강했다. 감각 수용체의 밀도가 높은 부위. T-오가넬의 에너지 포획이 집중되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언니의 손을 봤다. 숙련된 손이었다. 어디를 얼마나 누르면 어떤 반응이 오는지 아는 사람의 손. F-71에게도 이렇게 했겠지. 혜인의 몸을 이 손으로 만졌겠지.

마사지가 끝났을 때 수연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뉴럴 댐퍼와 마사지의 이완 효과. 가쁜 숨이 잦아들고,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후우... 힘들다."

유진 언니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옆 베드에 걸터앉았다.

"수연이 잘 자네요."

"뉴럴 댐퍼랑 같이 쓰면 효과가 좋아. 감각 과부하를 물리적으로 풀어주는 거니까."

언니가 목을 돌리며 뒷목을 손으로 눌렀다. 또 그 동작. 새벽에 헤드셋을 쓸 때도 같은 지점을 만졌다.

"언니, 목 뻣뻣해요?"

"응... 운전을 오래 했더니."

"제가 풀어드릴까요."

자연스럽게 말했다. 언니가 의외라는 듯 피식 웃었다.

"호오, 우리 지수가?"

"언니가 수연이한테 한 거 봤으니까. 따라할 수는 있죠."

언니는 엎드려 누웠다. 나는 손에 오일을 덜어 어깨 위에 발랐다.

어깨를 주무르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목 근육을 따라. 자연스럽게. 서두르지 않고.

목덜미에 닿았을 때 —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있었다.

머리카락 라인 바로 안쪽. 가로 1센티미터 남짓한 절개 자국. 점이나 뾰루지가 아니었다. 정교한 수술용 메스로 절개하고 봉합한 흔적. 피부 아래 딱딱한 이물감. 아주 작은 무언가가 심겨 있었다.

이 위치. 목 뒤. 척추가 머리로 이어지는 부근.

점도 아니고, 상처도 아니고, 정교하게 열었다가 닫은 자국. 그리고 그 아래 딱딱한 이물감. 뭔가를 넣었다.

유진 언니는 연구자라고 했다. 설계하고 집도하는 쪽이라고 했다. 실험 대상이 아니라.

그런데 이건 누군가에게 시술을 받은 흔적이다.

자발적으로 한 거라면 — 왜? 무엇을 위해 자기 몸에 무언가를 심은 건가.

자발적이 아니었다면 — 유진 언니에게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있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 이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해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음... 거기 시원하네."

언니가 웅얼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목소리.

"여기 좀 뭉쳤네요."

손가락으로 흉터 주변을 눌렀다. 언니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됐다. 0.5초. 그리고 다시 이완.

알고 있다. 거기에 뭐가 있는지. 그리고 내가 만지고 있다는 걸 — 느꼈을 수도 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언니가 몸을 일으켰다. 목을 돌리며 웃었다. 평소의 표정. 하지만 일어서면서 머리카락을 내린 손이 — 목 뒤를 한 번 더 만졌다. 덮듯이.

"고마워. 손맛이 제법인데?"

"별거 아니에요."


밤.

수연이 먼저 잠들었다. 유진 언니도 소파에서 잠들었다. 가평까지 다녀온 피로였을 것이다.

나만 깨어 있었다.

소파에서 잠든 유진 언니의 뒷목이 보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 지점. 손끝에 남아 있는 딱딱한 이물감.

연구자라고 했다. 설계하는 쪽이라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시술을 받은 흔적이 목 뒤에 있다.

새벽에 헤드셋을 쓸 때도 그 지점을 만졌다. 습관처럼.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의 손이었다.

혜인의 데이터를 기록했다고 했다. 오늘은 수연의 감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했다. "모니터링 목적"이라고 했지만 — 새벽에 혜인의 데이터를 재생하며 울던 사람이.

세이프 하우스는 이미 털려 있었다. 언니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곳이 안전하지 않았다.

수연의 약. 열 알. 열흘.

전부 엉켜 있었다. 언니의 흉터와, 수연의 약과, 아버지가 숨긴 레시피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흉터에 대해 지금 물으면 안 된다. 묻는 순간 내가 의도적으로 확인했다는 걸 언니도 알게 된다.

창밖으로 서울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아버지도 그랬고, 유진 언니도 그렇다.

차이가 있다면 — 이번에는 내가 먼저 알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