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19) - 지수

침입

일요일 오후. 백화점을 나서는 우리 손에는 저마다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초겨울 햇살이 따스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로수의 마지막 잎들이 떨어졌다. 노란색, 갈색, 붉은색. 낙엽이 보도블록 위를 굴러다녔다.

"오늘 수연 씨 완전 예뻐. 아까 화장품 매장에서 직원이 연예인이냐고 물어봤잖아."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수연의 귀가 붉어졌다.

"그건 그냥... 영업 멘트예요."

"아니야. 진심이야."

나도 거들었다. 사실이었다. 연한 베이지색 캐시미어 니트에 플레어 스커트. 반쯤 묶어 올린 머리가 목선을 드러냈다. 언니가 골라준 구두는 굽이 낮아 걷기 편해 보였다.

세 달 전만 해도 거울조차 보지 않던 사람이.

수연이 내 눈을 피하며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고,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뉴럴 댐퍼가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감각 수용체의 민감도가 낮아지면 세상이 덜 압도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웃을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배고프지 않아? 점심 먹으러 가자."

언니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오후 2시 반. 아침을 거르고 나온 우리는 다들 허기가 졌다.


식당은 백화점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밖으로 가로수가 보였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와 테이블 위에 따뜻한 직사각형을 그렸다.

"뭐 먹을래?"

메뉴판을 넘기며 물었다. 수연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읽고 있었다.

"파스타... 먹어도 돼?"

"당연하지. 오늘 많이 걸었으니까 칼로리 걱정 마."

언니가 웃었다. 수연이 조심스럽게 까르보나라를 가리켰다.

"그럼 이거."

"나도 같은 걸로. 지수는?"

"해산물 리조또요."

주문을 마치고 와인을 시켰다. 낮술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 수연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췄다. 긴 속눈썹 그림자가 볼에 드리워졌다.

"수연아."

내가 불렀다. 수연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기분 어때?"

"좋아."

수연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상하게... 오늘은 좋아."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수연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렇지? 이렇게 나오니까 기분 전환도 되고."

"응. 지수랑 언니랑 같이 있으니까."

수연이 웃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볼에 홍조가 번졌다.

와인이 나왔다. 잔을 들었다.

"건배. 뭐라고 할까?"

"음... 우리의 평화?"

언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평화."

세 개의 잔이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와인이 루비색으로 빛났다.


오후 5시 47분.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에서 쇼핑백을 꺼내며 웃음소리가 터졌다. 수연이 오늘 산 원피스를 언제 입어볼지 얘기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입어봐. 내가 머리 해줄게."

"진짜요? 언니가?"

수연이 감탄했다. 언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복도를 걸었다. 수연이 쇼핑백을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 듣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멈췄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어둠이 보였다. 안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잠깐."

언니가 팔을 뻗어 우리를 막았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문 잠그고 나갔지?"

"응. 분명히."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오후 1시. 수연이 먼저 나가고, 내가 문을 잠갔다. 디지털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하는 잠금 확인음까지 들었다. 분명히.

수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녀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언니가 천천히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여기서 기다려."

언니가 먼저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그녀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10초. 20초.

심장이 귀에서 울렸다. 수연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도 차가웠다.

"들어와."

언니의 목소리. 평소와 달랐다. 낮고, 단단하고, 분노가 섞여 있었다.


거실 불을 켰다.

소파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칼로 난도질한 것처럼. 솜이 터져 나와 눈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쿠션도, 방석도, 등받이도. 하얀 솜뭉치가 거실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한 걸음 들어섰다. 발밑에서 무언가가 바스락거렸다. 내려다보았다. 찢어진 잡지. 구겨진 영수증. 서랍장 안에 있던 것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서재로 향했다.

더 심했다.

책장의 책들이 모두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한 권 한 권 펼쳐진 채로. 아버지의 전공 서적들. 생화학,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내가 대학 때 쓰던 교재들. 수연이 읽던 소설책들. 누군가 책 속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지, 한 장 한 장 넘겨본 것이다.

컴퓨터 본체의 옆면 커버가 뜯겨 있었다. 나사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드디스크가 없었다. 빈 슬롯만 덩그러니. USB 포트에 꽂혀 있던 외장하드도 사라졌다.

침실로 갔다.

옷장이 활짝 열려 있었다. 옷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 옷, 수연의 옷, 뒤섞여서 구분이 안 됐다. 서랍장도 뒤집혀 있었다. 속옷, 양말, 스타킹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화장대 위의 보석함은 그대로였다.

뚜껑을 열어보았다. 금반지. 진주 목걸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브로치. 전부 그대로였다. 손도 대지 않았다.

현금도 마찬가지였다. 서랍장 안에 넣어둔 비상금 봉투. 그대로 있었다.

"이건..."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단순한 도둑이 아니야."

언니가 말했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뭔가를 찾고 있었어. 데이터를."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복도에서 기다려야 했다. 수연은 내 팔을 꽉 붙잡은 채 떨고 있었다. 유진 언니는 우리를 등 뒤로 감싸듯 서서 엘리베이터 쪽을 경계했다.

30분 후 지구대 경찰관 두 명이 도착했다. 젊은 남자와 중년 여자. 현장을 둘러보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요즘 이 근방에 이런 사건이 좀 잦아요."

중년 여자 경찰관이 말했다.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단순 빈집털이범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문단속 잘 하시고요. 피해 물품 리스트 작성해서 제출해 주시면 수사 진행하겠습니다."

"잠깐요."

내가 끼어들었다.

"현금은 손도 안 댔잖아요. 보석함도 그대로고요. 이게 단순 도둑질이에요?"

"놀라서 도망갔나 보죠."

"CCTV는요? 복도 카메라 확인해 봤어요?"

"아, 그게요."

젊은 경찰관이 머리를 긁적였다.

"CCTV가 먹통이었대요. 복도 카메라, 엘리베이터 카메라, 주차장 카메라 모두 같은 시간대에 신호가 끊겼다가 복구됐대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세요? 현금은 안 가져가고, CCTV는 정확히 그 시간에만 먹통이고."

"뭐, 장비 오류일 수도 있고요. 요즘 그런 일 많아요."

경찰관들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었다. '누군가 우리 집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고 말한들 믿어줄 리 없었다.

경찰이 다녀가고 나서도 부서진 도어록과 찢겨진 벽지는 그대로였다. 바닥에는 산산조각 난 가족사진 액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유리가 깨져 있었다. 금 간 유리 너머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 연구실에서만 살던 사람. 어린 시절의 내가 그 옆에 서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지 않고, 조금 떨어져서.

'아빠. 대체 뭘 남긴 거야.'


"여기에 계속 있을 순 없어."

깨진 도어록을 임시로 수리하며 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청테이프로 감아도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안전했던 적이 있었을까.

창밖을 힐끗 보았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 뭔가가 번쩍인 것 같았다. 망원경? 아니면 그냥 내 착각?

"빨리 움직여."


캐리어를 꺼냈다.

옷 몇 벌. 세면도구. 충전기. 수연의 약. 손이 떨려 지퍼가 자꾸 빗나갔다.

수연은 더 심했다. 캐리어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아직도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찢겨진 소파, 쏟아진 책들, 널브러진 옷가지들.

"수연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수연아."

다시 불렀다. 수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내가 할게. 가만히 있어."

내가 대신 챙겼다. 수연의 옷. 수연의 화장품. 수연의 약. 하나하나 캐리어에 넣었다.

수연의 손이 떨리며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배수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먼 곳에서 들리는 자동차 시동 소리. 모든 소리가 위협처럼 들렸다.

수연이 내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작은 소리에도 움찔거렸다. 어딘가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비명을 삼켰다.

"괜찮아. 내가 있어."

나는 수연의 손을 꽉 쥐었다. 하지만 내 손도 차가웠다.

언니가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나는 뒷좌석에서 수연을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혹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까 봐. 수연의 얼굴을 숨기려고.

"뒤에 따라오는 차 있어?"

언니가 백미러를 확인하며 물었다.

"모르겠어... 저 검은색 SUV?"

"끊어볼게."

언니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고 골목으로 빠졌다. 급커브에 수연의 몸이 내게 기울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내 가슴에 전해졌다. 빠르고, 불규칙하고,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몇 번의 우회 끝에 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졌어. 아마."

'아마'라는 단어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오후 7시 23분. 시내 중심가의 호텔. 스위트룸.

문이 닫히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호텔 특유의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 티끌 하나 없이 정돈된 침구. 두꺼운 커튼.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먼저 창문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그다음 욕실. 옷장. 침대 아래.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어깨의 힘이 풀렸다.

"일단 좀 씻자. 다들 꼴이 말이 아니네."

언니가 룸서비스로 와인과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고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려오자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나는 수연을 소파에 앉혔다. 클렌징 티슈를 꺼냈다. 그녀의 화장은 처참했다. 눈물과 식은땀으로 아이라인이 번져 팬더처럼 되어 있었다. 붉은 틴트 자국이 입가에서 턱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오늘 낮에 우리가 정성스럽게 칠한 펄 파우더가 얼룩덜룩 뭉쳐 있었다.

"가만히 있어봐. 여기, 눈가에 번졌어."

조심스럽게 티슈로 눈가를 닦았다. 검은 물이 묻어났다. 한 겹, 두 겹. 화장이 지워질수록 창백한 민낯이 드러났다.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떨리는 손으로 내 옷자락을 움켜쥘 뿐이었다.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무서워..."

수연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무서워... 지수야, 나 무서워..."

"알아. 나도 무서워."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하지만 같이 있으면 괜찮을 거야. 언니랑 내가 있잖아."

나는 그녀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내 손도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 앞에서는 강해야 했다. 내가 무너지면 수연도 무너진다.


목욕을 마치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세 사람이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 층 아래로 보이는 자동차 불빛들. 네온사인. 빌딩 숲. 저 아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일상을 살고 있겠지.

유진 언니가 와인 잔을 비우더니 내려놓았다. 심각한 표정.

"이제 솔직히 말해야 할 것 같아."

"뭐가?"

"오늘 일. 누가 했는지."

"뭐 짐작 가는 게 있어?"

내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칼릭스라면... 우리 회사 말이야? 아빠가 세운..."

"응. 네가 매일 출근하는 그곳."

내가 다니는 회사. 아버지가 세운 회사. 그곳이 우리를 노린다고?


"뭔가를 찾고 있었어. 박사님이 숨긴 것을."

언니가 탁자 위에 젖은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숨긴 것?"

"레시피 2.0."

"2.0?"

"T-오가넬의 개량형 설계도야. 박사님이 완성하신 직후... 그걸 어딘가에 숨기셨어. 회사 서버에 올리지 않고."

"왜?"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

"첫째. 윌리엄."

윌리엄. 칼릭스의 CEO. 아버지의 공동창업자.

"윌리엄은 이 기술을 부자들에게 팔려고 했어. 영생을 상품으로. 수백조 원짜리 비즈니스. 박사님은 그걸 용납할 수 없으셨지."

"부자들만 영원히 산다..."

"응. 박사님은 말씀하셨어."

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돈 있는 자들만 죽음을 피하는 세상은 지옥이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구실에서만 살던 무표정한 사람. 가족보다 연구를 우선시했고, 나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던 그 아버지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니.

"둘째는..."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진지했다.

"너야. 지수."

"나?"

"레시피 2.0은 순수한 MELAS 치료제로 개량된 버전이야. 영생 기능은 없애고."

언니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박사님이 그걸 만든 건 처음부터 너를 위해서였어."

"MELAS는 모계 유전이잖아. 네 엄마가 앓던 병. 너에게도 발현될 수 있어. 박사님은 그걸 막고 싶으셨던 거야."

눈앞이 흐려졌다.

아버지가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던 이유. 가족을 외면한 게 아니었다. 가족을 지키려던 것이었다.

레시피 2.0을 나를 위해 만들어놓고 — 그 사실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사람이다. 보호와 방치의 경계가 어딘지 모르겠다.

"그래서 회사가 집을 뒤진 거야?"

"그런 것 같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와인 잔 속에서 액체가 흔들렸다.

"언니."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빠의 교통사고... 정말 사고였어?"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증거는 없어. 하지만."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박사님이 돌아가신 직후, 윌리엄은 모든 실험 데이터를 회수했어. 프로토타입도. 심지어..."

언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F-71도."

혜인 선배. 언니와 살던 사람.

"레시피의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회수해서... 샅샅이 뒤졌어."

언니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정밀 기계를 분해해서 설계도를 찾듯이. 레시피를 찾기 위해서라면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눈물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내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어. 혜인 선배가... 그렇게..."

언니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무너졌다. 어깨가 떨렸다.

나는 손을 뻗어 언니의 어깨를 잡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시간.

"언니 잘못이 아니야."

수연이 먼저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했다.

"아무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언니 잘못이 아니야."

언니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아..."

"나도 같은 몸이잖아. 혜인 선배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선배도 언니를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같은 틀에서 나온 두 여자. F-71과 F-72. 한 사람은 사라졌고, 한 사람은 여기 있다.


"그리고 놈들은 이제 여기로 온 거야."

언니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다시 단단해졌다.

"박사님의 유일한 혈육인 너. 그리고 박사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가장 진보된 완성형 바디 F-72. 이 둘 중에 진짜 레시피, 히든 키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언니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F-72에 네 남편의 뇌가 이식된 게 우연이었을까?"

목덜미 털이 곤두섰다.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박사님의 딸. 칼릭스 직원인 네가. 박사님이 남긴 가장 완벽한 바디 F-72와. 남편의 뇌 이식이라는 형태로 연결됐어."

언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무 깔끔하지 않아?"

"그러면... 준우의 사고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준우의 교통사고.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F-72 이식 제안.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라고.

하지만 그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면?

나와 F-72를 엮기 위해. 레시피를 찾기 위해. 준우가 희생된 것이라면?

"몰라. 확신할 순 없어. 하지만 우연이라고 믿기엔..."

언니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핸드백 속 사원증을 꺼내 바라보았다. 파란색 랜야드. 매일 목에 걸던 것. 칼릭스. 아버지의 회사. 나를 고용한 회사. 남편을 빼앗고, 되돌려준 척하고, 이제 나를 사냥하는 회사.

"나... 무서워. 언니, 우리 이제 죽는 거야?"

수연이 울먹이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수연을 안아주었지만, 내 팔 역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죽지 않아."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내가 한 말인지도 모르겠었다.

"죽이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나는 수연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유진 언니를 바라보았다.


"방법이 있을까?"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있어. 아마."

언니가 대답했다.

"레시피를 먼저 찾는 거야. 놈들보다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협상할 수 있어."

"근데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잖아."

"박사님은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았을까? 딸인 너에게도?"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남긴 것. 유품, 편지, 메시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사이는 그만큼 멀었으니까.

"모르겠어... 아빠랑 나는 별로 대화도..."

말끝이 흐려졌다.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죽기 전에 단 한마디라도 더 나눌 걸. 한 번이라도 안아줄 걸.

"천천히 생각해 봐.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돼."

언니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창밖의 네온사인이 깜빡였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화려했다. 우리만 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일단 오늘은 자자. 내일 다시 생각하자."


다음 날 아침. 월요일.

휴가를 내려면 일단 회사를 가야했다. 나는 회사로 향했다.

택시를 탔다.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혹시 누군가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검은색 세단. 은색 SUV. 어떤 차든 수상해 보였다. 모든 사람이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이러다 편집증 걸리겠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동료와 마주쳤다.

"은 연구원, 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좀 피곤해서요."

"요즘 다들 그래. 회사 분위기가 영 안 좋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사무실에 들어섰다. 타다닥거리는 키보드 소리. 전화벨 소리. 복사기 돌아가는 냄새. 평소라면 숨 막힐 듯 익숙했을 그 풍경이, 오늘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상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여기서 일했다. 매일 출근하고, 회의하고, 보고서를 썼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 이런 어둠이 숨어 있었다니.

사내 시스템으로 휴가원을 제출했다. 남편의 사고 후유증. 간병. 핑계는 충분했다.

"은 연구원, 휴가 냈네? 일주일이나?"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였다. 아니, 내가 예민해진 것일까.

"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잘했어. 요즘 회사 분위기 뒤숭숭하고 복잡한데, 이럴 때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나아."

팀장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돌아섰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책상으로 걸어가는 동안, 누군가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것 같았다.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들 자기 일에 바빴다. 그런데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아버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 창립 기념 사진.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드문 표정이었다.

사진을 가방에 넣었다.

걸음을 재촉해 건물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유진 언니는 없었다. 테이블 위에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수연 잘 보고 있어.]

급하게 처리할 일. 언니가 혼자 움직이고 있다. 뭘 하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수연의 약 — 열한 알 남았다.

수연을 확인했다.

수연이 침대 헤드에 기대어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랐다. 나른하고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안경을 쓰고 화면을 응시하는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질주했다. 복잡한 재무제표와 주식 차트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손이 멈췄다. 안경을 치켜올리며 모니터를 노려보는 눈빛. 집중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던 사람. 준우.

이상한 감각이었다. 반갑다는 게 아니다. 수연이라는 사람이 있고, 그 안에 준우의 뇌가 있고 — 지금 이 순간 그 경계가 흐려져 있다. 수연이 이걸 하고 있는 건지, 준우의 뇌가 수연의 몸을 쓰고 있는 건지. 그 구분이 수연 본인에게도 가능한 건지.

"뭐 해?"

내가 물었다.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아, 언니. 왔어?"

목소리마저 달랐다. 평소의 부드럽고 의존적인 어조가 아니라, 무언가에 몰두한 사람 특유의 건조한 말투.

"칼릭스. 뒷조사 좀 하고 있었어."

"뒷조사?"

"응. 유진 언니 말대로 닥터 윌리엄이라는 사람, 수상해. 아니, 칼릭스라는 회사 자체가 지금 시한폭탄이야."

나는 수연 옆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숫자와 그래프가 빼곡했다. 나도 회계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깊이 파고드는 건 — 준우의 영역이었다.

"공시 정보랑 뉴스 기사들을 좀 훑어봤어."

수연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그래프가 가파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주가 폭락. 이건 예고된 거야. 재무제표를 뜯어보니 최근 몇 년간 현금성 자산이 급격히 줄었어. 투자처가 불분명하고."

수연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석이 끝난 후의 확신에 찬 눈.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이 자금이 빠져나간 시점이랑... F-72 프로젝트가 폐기 단계로 넘어간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거야."

"회사가 레시피에 쏟아부은 돈이 회수 불가능해진 거지. 그래서 더 급해진 거고."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가 침몰하기 전에 뭐라도 건지려면, 놈들은 더 조급해질 거야. 시간이 없으니까."

"그러면 레시피를 먼저 찾는 게 더 급해졌다는 뜻이기도 해."

나는 수연의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정교한 분석이었다. 준우의 능력이 수연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건 — 무기가 될 수 있다.

불편한 생각이었다. 수연의 능력을 '무기'로 계산하는 내가. 190장에서 인식한 것 — 수연을 동등하게 보지 않게 된 것 — 이 지금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마워. 이거 중요한 정보야."

수연에게 말했다. 수연이 아니라 수연의 뇌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저녁이 되었다. 유진 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가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없었다.

밤 10시. 11시.

수연의 약을 꺼내 세었다. 열한 알. 오늘 하나를 먹이면 열 알. 열흘.

유진 언니가 자발적으로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자발적이라면 — 왜? 못 오는 거라면 — 누가?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았다. 유진 언니에게 의존하는 구조가 무너지면 수연이 위험하다. 뉴럴 댐퍼 없이 수연의 몸은 감각 과부하로 간다. T-오가넬이 에너지를 요구하고, 전두엽이 꺼지고.

레시피 2.0. 거기에 답이 있다.

아버지가 숨긴 곳. 아무도 모르는 곳. 칼릭스도 못 찾은 곳. 유진 언니도 모르는 곳.

나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 그건 아버지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무언가와 관련돼 있을 거다. 우리 사이는 멀었지만. 멀었기 때문에 오히려 — 다른 누구도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수연이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창밖의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