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16) - 지수
텔로미어
거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진 언니가 던진 말. '이성적 사고의 상실.' 그 단어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수연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내 옷자락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니 정체가 뭐야?"
날 선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F-72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아?"
유진 언니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내가 만든 건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만들었지."
"'우리'?"
"나, 그리고 은현철 박사님."
멈췄다. 숨이 아니라 머리가.
"네 아버지 말이야."
"아빠가... F-72를 만들었다고?"
목소리가 떨렸다. 옆에서 수연이 내 손을 꽉 쥐었다.
"말도 안 돼. 아빠는 유전공학 전공이긴 했지만, 세포 연구만 하셨잖아."
"그건 대외적인 커버였어."
언니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사님이 진짜 천착했던 건 세포가 아니라 '시간'이었어. 생체 시계를 멈추는 기술. 그리고 MELAS를 치료하는 기술."
MELAS.
엄마를 앗아간 병. 그리고 내 안에도 잠들어 있는 시한폭탄.
아버지의 서재가 떠올랐다. 밤늦게까지 켜져 있던 스탠드 불빛. 창백한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뒷모습. 세포 연구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프니까 관련 연구를 하시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 이거였다. 같은 기억인데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 뒷모습이 낯설어졌다.
"아빠가... 그걸 연구하고 있었어?"
"네 엄마가 진단받았을 때, 박사님은 미친 사람처럼 연구에 매달렸어. 같은 병이 너한테도 발현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처음엔 자금이 없었어."
언니가 소파에 앉았다.
"대학 연구비로는 턱없이 부족했지. 그때 윌리엄이 나섰어."
"윌리엄?"
"마이클 강. 지금 칼릭스의 CEO. 박사님의 대학 동기였어."
가슴 안쪽이 복잡하게 뒤틀렸다. 마이클 강. 며칠 전 그가 보내준 네이비색 재킷이 옷장에 걸려 있다. 의장석에 앉았을 때 몸이 가벼워지던 감각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 사람이 — 아버지의 연구를 가능하게 한 사람이었다.
"윌리엄이 자기 아버지한테 투자를 받아냈어. 터너 가문. 월 스트리트의 큰손."
"얼마나?"
"10억 달러."
투자 규모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환산됐다. 1조 원. 이 돈이면 연구가 아니라 사업이다.
"공짜는 아니었겠지."
언니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내가 먼저 도착한 것을 확인한 눈.
"터너 회장이 조건을 걸었거든."
"영생."
"......맞아. MELAS 치료제만으로는 투자할 수 없다. 바이오 바디를 만들어라. 부자들에게 영생을 팔 수 있는 상품을."
그게 F-72의 시작이었다.
"지수야, 텔로미어 알지?"
"염색체 끝에 달린 보호 캡. 세포 분열 때마다 짧아지고, 한계점에 도달하면 세포가 사멸하는."
"박사님은 그 타이머를 멈추는 방법을 찾아냈어."
언니가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세포 구조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미토콘드리아의 기원에 대해 알아?"
"내공생. 20억 년 전에 큰 세포가 산소 호흡 박테리아를 잡아먹었는데 소화시키지 못하고 공생하게 된 것."
언니가 잠깐 멈췄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
"박사님은 그 사건을 재현했어."
화면에 애니메이션이 재생되었다. 큰 세포 안에서 살아남은 작은 생명체.
"텔로미어를 무한히 복구할 수 있는 특수한 합성 단백질 복합체. 일명 'T-오가넬'. 우리는 그걸 인간의 세포 내에 주입하는 데 성공했어."
T-오가넬.
"F-72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미토콘드리아 외에 제3의 기관이 공생하고 있어. 이 녀석이 끊임없이 텔로미어를 수선해."
수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 피부 아래 세포 하나하나에 아버지가 만든 무언가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영생이 가능한 거야."
"대가가 뭐야."
물은 게 아니었다. 공생이면 반드시 대가가 있다. 미토콘드리아가 산소를 태워 ATP를 만들듯이, T-오가넬에도 에너지원이 있을 것이다.
"......활동 전위."
언니가 화면을 넘겼다. 신경세포 다이어그램이 나타났다.
"신경계에서 전기 신호가 터질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포획해서, 텔로미어를 수선하는 화학 에너지로 변환하는 거야."
"전기 신호면 — 모든 감각 자극."
"쾌락. 고통. 촉각. 모든 격렬한 신경 발화가 이 불멸의 세포들을 먹여 살리는 발전소야."
언니가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F-72의 감각 수용체가 일반인의 네 배나 예민하게 설계된 거야. 고밀도의 자극 데이터가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T-오가넬이 생존할 수 있으니까."
등 뒤로 찬 것이 흘렀다.
수연을 안을 때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때마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내가 한 모든 접촉이 — 이 몸 안의 기생체에게 연료를 공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주도.
그 남자의 접촉이 수연에게 한 것. 몸이 저항하지 못했던 이유. 작은 터치에도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반응했던 이유.
전부 설계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네 배는 아니었어."
언니가 덧붙였다.
"M-01,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세 배였어. 하지만 T-오가넬이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지. F-71은 세 배, F-72는 네 배. 버전이 올라갈수록 감각 수용체도 강화됐어."
"M-01?"
"남성형 바이오 바디. M은 Male, F는 Female. F-72는 72번째 여성형 프로토타입이야."
72번째. 71번의 실패.
유진 언니의 연인이 F-71이었다. 혜인. 같은 계열의 바디에 같은 결함.
"T-오가넬이 신경계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착취하면 어떻게 돼?"
내가 물었다. 언니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았다.
"뇌가 버틸 수 없겠지. 과열된 시스템이 자기를 보호하려면 — 에너지 소모가 큰 기능부터 끌 거야."
언니가 태블릿에서 뇌 스캔 이미지를 띄웠다.
"전두엽. 이성과 판단을 담당하는 영역."
"전두엽이 꺼지면 통제권이 변연계로 넘어가."
"본능과 쾌락의 영역."
내가 말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지적 엔트로피가 임계점을 넘으면, 뇌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느끼기'만 하는 상태로 도망쳐."
"타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선택하는 거야."
이성적 사고의 상실. 아까 언니가 말한 것이 이거였다.
수연을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날. 수연의 눈이 풀려 있었다. 샤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문을 두드렸을 때 — 멍하게 물을 맞고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수연이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라고.
그게 아니었다. 뇌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이성을 꺼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언니가 말을 이었다.
"T-오가넬은 에너지가 부족하면 스스로 진화해. 숙주의 신경 전달 물질 분비를 조작해서 더 강하고 잦은 자극을 유도하도록."
"몸 안의 기생체가 뇌를 조종해서 더 많은 자극을 원하게 만든다고?"
"더 많은 연료를 얻기 위해서."
수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수연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야근하고 돌아왔을 때 수연이 보여준 반응들. 평소보다 더 매달렸던 밤들. 내 접촉을 갈구하듯 가까이 오던 것. 수연의 의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T-오가넬이 유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 그때마다 수연이 원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 안아준 거다. 이 몸의 기생체가 원하는 걸 수연이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그리고 이게 초기 버전, '레시피 1.0'의 치명적인 결함이야."
"박사님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알고 있었어."
언니가 태블릿에서 다른 파일을 열었다. 그래프와 데이터가 화면을 채웠다.
"T-오가넬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신경계를 과도하게 착취하면, 신경계가 타버려. '뉴럴 번아웃'. 최악의 경우 뇌사에 이르지."
"아버지는 인체 실험을 반대했겠지."
"M-01 때부터 경고했어. 뉴럴 쇼크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안 된다고."
"그런데 터너 회장이 압박했고."
"6개월 안에 프로토타입을 보여주지 않으면 투자를 철회하겠다고."
"그래서 윌리엄이 밀어붙였고."
알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구조가 보인다는 뜻이었다. 투자자의 압박, 자금의 제약, 시간의 한계. 윌리엄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결함 있는 프로토타입의 제작을 승인한 것이다. 비즈니스 판단.
나도 의장실에서 비슷한 계산을 한 적이 있다. 리스크를 알면서 일정에 맞추기 위해 승인한 적이.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위장이 뒤틀렸다. 수연의 몸이 결함 있는 채로 만들어진 걸 — '구조가 보인다'고 정리하려는 내가.
"레시피 1.0으로 바이오 바디를 만들었어. 결함을 알면서도."
"그럼 지금 수연 몸에 있는 건..."
"레시피 1.0. 결함이 있는 초기 버전."
수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박사님은 끝까지 반대했어. 하지만 윌리엄이 밀어붙였지. 투자자들에게 시연하기 위해. 그리고..."
언니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박사님은 레시피 2.0을 만들었어. 결함을 수정한 개량형. 하지만 윌리엄에게 넘기지 않았어."
"뭐가 다른데?"
"동적 리미터가 걸려 있어서, 세포 내 에너지가 부족할 때만 T-오가넬이 작동해. 텔로미어 복구 기능도 차단되어 있어."
"영생 기능을 뺀 거야."
"순수한 MELAS 치료제로만 작용하도록 개량된 거야. 감각 수용체 증폭도 필요 없어. 뉴럴 쇼크도 없고."
MELAS 치료제.
아버지가 처음부터 만들려고 했던 것. 터너 회장의 돈이 방향을 틀어버리기 전에. 아버지가 정말 만들고 싶었던 것.
나를 위한 것이었다.
"면역 체계가 이물질로 인식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위장하는 기술도 적용됐어. 거부 반응이 없어."
"그러면 수연한테도 쓸 수 있어? T-오가넬 자체를 교체하면 — 감각 과민도, 뉴럴 쇼크도 — "
"사라져."
수연이 이 몸 안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다. 접촉에 전기가 오르지 않고. 뇌가 꺼지지 않고. 기생체에 끌려다니지 않고.
"어디 있어."
"문제가 있어."
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시피 2.0은 어디에도 없어. 박사님이 숨겼거든."
"윌리엄이 이 기술을 영생 상품으로 팔려고 했으니까."
내가 말했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님은 그걸 막으려고 레시피를 숨긴 거야. 어딘가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아버지가 떠올랐다.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던 모습. 윌리엄과 격하게 다투던 모습.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 뒷모습.
그 모든 것이 이것 때문이었다.
"박사님은 말했어."
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기술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아.'"
"그래서 숨긴 거야."
"응. 레시피 2.0은 어딘가에 있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럼 지금 수연은 어떻게 해?"
"나는 이 바디의 설계에 참여했어. F-72의 호르몬 밸런스를 조절하고, 신경 전달 물질을 억제해서 스로틀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언니가 가방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를 열자 붉은색 캡슐과 하얀색 정제가 들어 있었다.
"'뉴럴 댐퍼'. 감각 수용체의 민감도를 낮춰서 뇌가 숨 쉴 틈을 주는 억제제야. 제조법을 아는 사람도 나뿐이야."
제조법을 아는 사람도 나뿐이야.
이 말이 귀에 걸렸다. 수연은 이 약 없이 살 수 없다. 이 약은 유진 언니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시피 2.0이 없는 한 — 수연의 생명줄은 유진 언니 손에 있다.
"수연 씨의 몸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의 육체야. 하지만 그 안에 든 준우 씨의 정신은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낡은 그릇이야."
"얼마나 자주 먹어야 해?"
"처음엔 하루에 한 번. 상태를 보면서 조절해야 해."
언니가 수연에게 다가갔다. 수연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수연 씨. 입 벌려요."
수연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체념한 표정이었다.
언니가 손가락으로 약을 수연의 혀 위에 올렸다. 그 손가락이 수연의 입술에 닿았다.
"착하네."
주먹을 쥐었다.
낮에 CCTV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잠든 수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언니의 손. 커피잔에 입술을 대던 모습. 혜인의 바디. F-71. 같은 계열.
유진 언니가 수연의 몸을 보는 시선이 — 의사의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수연의 몸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탄력 있는 피부. 예쁜 곡선. 시선이 머물렀던 것. 유진 언니와 내가 같은 곳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불편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아니었다.
"약효가 빠를 거야. 푹 자게 둬."
언니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수연의 눈이 이미 풀려 있었다.
"지수야..."
힘없는 목소리.
"응. 여기 있어."
침대로 부축했다.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인형처럼.
눕히자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무서워..."
잠결에 중얼거리는 소리.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옆에 누워 안았다. 체온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이 접촉이 T-오가넬에게 연료가 되고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체온이 수연의 감각 수용체를 자극하고, 그 신호가 포획되고 있을까.
안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놓으면 수연이 운다.
수연이 잠든 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천장을 보며 정리했다.
레시피 2.0을 찾으면 뉴럴 댐퍼가 필요 없어진다. 유진 언니의 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수연이 자기 몸 안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다. 그리고 MELAS 치료제이기도 하니까 — 나도.
유진 언니가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지 아직 모르겠다. 아버지의 당부인지, 혜인의 복수인지, 아니면 CCTV에서 본 그 손길 때문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 지금 수연의 생사가 유진 언니의 손에 달려 있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안 된다는 것.
아버지가 숨긴 곳. 윌리엄도 못 찾은 곳. 연구실. 서재. 예전 집. 장례식 이후 정리하지 못한 물건들.
어딘가에 단서가 있다.
수연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약 덕분인지 표정이 편안했다. 유진 언니가 만든 약. 유진 언니만 만들 수 있는 약.
임시방편이다.
창밖에서 새벽빛이 스며들 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