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12) - 수연
제주도
제주 공항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비릿한 바다 냄새. 겨울바람.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며 뺨에 달라붙었다. 서울과는 다른 공기였다. 냄새, 바람, 온도 —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피부가 전부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코가, 귀가, 손끝이 — 전부 열려 있었다.
공항 앞 차도에서 배기가스와 바다 냄새가 뒤섞였다. 야자수가 바람에 휘어지고 있었다. 렌터카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관광객들의 캐리어 바퀴가 아스팔트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소리가 너무 많았다. 전부 한꺼번에.
다리가 풀렸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수가 부축했다. 렌터카 뒷좌석에 태워주고 담요로 감싸주었다. 문이 닫히고 바깥이 차단되자 — 겨우 숨이 돌아왔다. 차 안은 고요했다. 새 차 냄새가 났다. 방향제의 인공적인 꽃향기. 유리 너머로 세상이 무음 영화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괜찮아, 수연아. 나 여깄어."
차가운 물티슈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눈을 감았다. 지수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담요 아래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안에만 있었으니까 몰랐다. 바깥 세계가 이렇게 크고 시끄럽고 날카로운 것인지.
중문 단지의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하는 동안 대리석 바닥의 발소리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높은 천장 아래서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귀가 먹먹해졌다.
객실 문이 열렸다. 넓었다. 킹사이즈 침대, 갈색 가죽 소파, 대형 유리창. 창밖으로 겨울 바다가 보였다. 회색 하늘 아래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소리가 창 너머로 아득하게 들렸다.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수가 뒤에서 안아주었다. 턱이 어깨에 얹혔다. 체온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이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에 사랑 같은 건 없어."
지수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밤바다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지고. 밀려왔다가 빠지고. 그 리듬이 숨결처럼 반복되었다. 오래간만에 평화로웠다.
이튿날.
오전에 해안 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현무암 돌담이 스쳐 지나갔다. 돌담 너머로 억새가 바람에 눕고 있었다. 귤나무 밭이 지나가고, 그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바다색이 구간마다 달랐다. 짙은 남색에서 초록으로, 다시 회색으로.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출 때만 바다가 잠깐 푸르게 빛났다.
점심은 해안가의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플라스틱 의자. 벽에 낡은 메뉴판이 붙어 있었고, 주방에서 국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 유리창에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이 뿌옇게 보였다.
해물뚝배기를 시켰다. 뚝배기가 나왔을 때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김이 얼굴까지 올라왔다. 매콤한 냄새. 천천히 떠먹었다. 예전처럼 급하게 먹지 않았다. 숟가락을 쥐는 방식이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식사 후 해변을 걸었다. 검은 모래였다. 현무암 자갈이 파도에 씻겨 반들반들했다. 발밑에서 자갈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찰각찰각 났다. 멀리 방파제 끝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울었다. 겨울 바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둘뿐이었다.
지수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컸다. 내 손을 완전히 감쌌다. 바람이 세서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우리... 괜찮은 거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파도가 발밑으로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모래가 발 아래에서 쓸려나갔다. 서 있는 땅이 자꾸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수는 더 묻지 않았다. 파도만 계속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저녁.
지수가 호텔 최상층의 라운지 바에 가자고 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창밖의 바다가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평선 위에 걸린 구름이 불에 탄 것처럼 붉었다.
옷장 앞에 섰다. 옷장 문에 달린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호텔 가운 차림. 블랙 미니 드레스를 꺼냈다. 등 라인이 견갑골 아래까지 깊게 파여 있었다. 지수가 사준 옷이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았다. 행어에 걸려 있던 모습 그대로 구김 하나 없었다.
거울 앞에서 들어보았다.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천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매끄럽고 무거운 원단이었다.
입었다.
거울 속의 여자. 등이 드러나 있었다. 어깨뼈, 척추의 라인, 허리의 곡선. 낯선 사람 같았다. 조명 아래서 피부가 하얗게 빛났다.
지수가 욕실에서 나왔다. 수증기가 따라 나왔다. 나를 보았다. 잠깐 말이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예뻐."
"너무 야해?"
"아니."
잠깐 뜸을 들였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근데 남자들이 많이 볼 텐데."
그 말에 — 가슴이 뛰었다. 왜.
"괜찮아."
왜 괜찮은지 나도 몰랐다.
라운지에 들어섰다. 조명이 어둡고, 음악이 낮게 깔려 있었다. 재즈. 색소폰 소리가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칵테일 잔이 부딪히는 소리, 낮은 웃음소리, 향수 냄새가 섞인 공기. 천장에서 내려온 간접 조명이 사람들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다. 바 뒤편으로 제주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들. 어선인지, 횟집의 간판인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느껴졌다. 등을 타고 내려가는.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다리로.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의식되었다. 힐이 카펫 위를 밟았다. 소리가 죽었다. 소리 없이 걸었다.
바 스툴에 앉았다. 가죽 시트가 차가웠다. 맨 등이 등받이에 닿았다. 칵테일을 주문했다. 바텐더가 셰이커를 흔들었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리듬처럼 울렸다. 잔이 놓였다. 연분홍색 액체가 조명을 받아 빛났다.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뜨거운 것이 위장에서 퍼졌다.
지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수가 뭔가를 말했다.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바 너머로 바텐더가 잔을 닦고 있었다. 재즈 곡이 바뀌었다. 트럼펫이 느리게 울었다. 평범한 저녁이 될 수 있었다.
수트 차림의 남자 세 명이 다가왔다. 비싼 구두가 카펫 위를 밟는 소리.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거절해야 했다. 지수를 보았다. 지수도 나를 보았다.
"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수의 눈에 뭔가가 스쳤다. 잡히지 않는 것. 불안인지, 실망인지. 칵테일 잔을 잡은 손가락이 하얘졌다.
남자들이 앉았다. 비싼 향수 냄새가 났다. 우디한 향.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만 빼고.
그중 한 명이.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턱선이 날카로운.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눈을 피하지 않고. 잔을 기울일 때도. 다른 사람이 말할 때도.
민석이라고 했다.
시선이 피부에 얹히는 것 같았다. 드러난 등 위로. 쇄골 위로.
가슴이 뛰었다.
술이 돌았다. 두 잔, 세 잔. 얼음이 잔 안에서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머리가 몽롱해졌다. 남자들이 말을 걸었다. 대답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눈을 맞추고 있었다. 어깨를 기울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민석의 무릎이 내 무릎에 스쳤다. 전기 같은 것이 흘렀다. 바 스툴 사이의 거리가 좁았다. 아니, 좁아진 것이다.
밀어내야 했다.
밀어내지 못했다.
지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걱정과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잔을 내려놓고 핸드백 끈을 쥐고 있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복도를 걸었다. 라운지의 소음이 뒤로 물러갔다. 복도는 조명이 더 어두웠다. 벽에 걸린 추상화가 간접 조명을 받아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 하이힐의 굽이 가끔 카펫 아래의 단단한 바닥을 건드려 딸깍 소리를 냈다.
다리가 떨렸다. 몸 안쪽이 뜨거웠다. 설명할 수 없는 열. 아랫배에서 시작해서 가슴까지 차오르는.
화장실을 찾았다. 복도 끝이었다. 나무 문에 금색 글씨로 'WOMEN'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면대에 손을 짚었다. 대리석이 차가웠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위에 작은 조명이 달려 있었다. 따뜻한 색. 그 빛 아래서 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뭐지. 왜 이래.
찬물로 얼굴을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소리가 타일 벽에 울렸다.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돌아보았다.
민석이었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에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알아요."
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작은 소리였는데 화장실 전체에 울리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렸다.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타일이 드러난 등에 닿았다. 등 라인이 깊게 파인 드레스. 타일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끌렸어요."
도망쳐야 했다. 소리를 질러야 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턱을 잡았다. 거칠고 뜨거운 손이었다.
척추를 타고 뭔가가 흘렀다. 뇌가 하얘졌다.
손이 남자의 가슴에 닿았다. 밀어내려고 했다. 분명히 밀어내려고 했다. 손가락이 셔츠를 움켜쥐고 있었다.
입술이 닿았다.
뜨거웠다.
안 돼.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 돼.
신음이 새어나왔다. 내 입에서. 여자의 신음이. 수도꼭지의 물소리에 묻혔다.
머리가 비명을 질렀다. 몸이 듣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허리를 잡았다. 들어올렸다. 세면대 위에 앉혀졌다. 대리석이 허벅지 아래서 차가웠다. 거울이 등 뒤에서 차가웠다. 다리 사이로 남자가 들어왔다.
드레스가 허리까지 밀려 올라갔다. 남자의 손이 허벅지를 잡고 있었다. 거칠었다. 손가락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안으로. 무게가. 압력이.
눈을 감았다. 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감각이 전부 삼켰다.
세면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 거울이 덜컹거리는 소리.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 그것들이 —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천장의 조명이 흔들렸다. 아니, 내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다.
좋았다.
그게 제일 끔찍했다.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열이, 수축이, 경련이 — 내 허락 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몸이 원하고 있었다. 더.
짧았는지 길었는지 모르겠다.
끝났을 때.
남자가 물러났다. 뭔가를 말했다. 웃었다.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아직 흐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복도의 카펫 위를 멀어지는 발소리.
혼자가 되었다.
화장실이 고요했다. 물소리만 남았다.
세면대에서 내려왔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발이 타일 바닥에 미끄러졌다. 벽을 짚었다. 드레스를 내렸다. 손이 떨렸다. 화장지를 뽑았다. 딱딱한 디스펜서가 딸깍거렸다. 닦았다. 안쪽을. 허벅지를. 아무리 닦아도.
수도꼭지를 잠갔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귀가 울렸다.
거울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립스틱이 번져 있었다. 어깨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손가락 자국. 조명이 그 자국 위에 따뜻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잔인할 만큼 선명했다.
오래 바라보았다.
멈출 수 있었다. 소리 지를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하지 않았다.
왜.
좋았으니까.
세면대를 붙잡았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대리석 위에 물방울이 흩어져 있었다.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립스틱을 닦았다. 어깨의 자국은 — 드레스가 가려줄 것이다.
숨을 들이쉬었다. 거울 속의 여자가 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허벅지 안쪽이 아팠다. 미끄러운 감각이 남아 있었다.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 벽에 걸린 추상화가 지나갔다. 복도가 길었다.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라운지가 보였다. 어둠과 조명. 재즈가 아직 흐르고 있었다. 트럼펫이 길게 울고 있었다.
지수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복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들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테이블 위에 빈 잔들만 남아 있었다. 얼음이 녹아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지수의 눈.
불안에 질린 눈. 내가 나가고 나서 계속 저 눈으로 복도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 시간 가까이.
"지수야... 가자."
목소리가 떨렸다.
지수가 내 얼굴을 보았다. 뭔가를 읽으려는 것 같았다. 묻지 않았다.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려놓았다. 바텐더가 가져갔다.
객실. 문이 닫혔다. 잠금장치가 돌아갔다. 조명이 어두웠다. 나갈 때 그대로였다. 침대 위에 아까 입으려다 만 카디건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커튼 사이로 제주의 야경이 보였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들이 물결에 일그러지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지수가 침대 끝에 앉았다. 나는 서 있었다. 다리가 떨려서 앉을 수 없었다. 창밖의 불빛이 얼굴 위에 일렁였다.
"무슨 일 있었어? 솔직하게 말해."
한참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파도 소리만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키스했어."
"......뭐라고?"
"그 남자가 따라왔어. 화장실까지. 그리고."
멈췄다. 숨을 쉬었다. 에어컨 바람이 맨 등을 스쳤다.
"밀어내지 못했어."
지수가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굳어갔다. 그림자가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었다.
"왜."
"몰라."
"왜 밀어내지 못했냐고."
"몰라, 지수야. 진짜 몰라."
거짓말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키스가 아니라는 것도. 좋았다는 것도. 아무것도.
"이 몸이 무서워."
그것만 말했다. 그것만 진실이었다.
지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창밖의 파도 소리만 들렸다. 멀리서 배의 기적 소리가 한 번 울렸다. 길고 낮은 소리. 그리고 다시 파도.
"씻을게."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잠갔다. 잠금장치를 돌리는 손이 떨렸다. 한 시간 전, 다른 문에서 들었던 소리와 같은 소리였다.
욕실은 밝았다. 형광등이 모든 것을 드러냈다. 옷을 벗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몸. 어깨의 붉은 자국. 허벅지 안쪽의 붉은 자국. 허리에 손가락이 파고든 자국. 형광등 아래서 그 자국들이 지도처럼 보였다. 어디에 무엇이 닿았는지 표시해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샤워기를 틀었다. 수도관이 벽 안에서 울렸다. 물이 나오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차가운 물이 먼저 나왔다.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물 아래 섰다.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문질렀다. 팔을. 어깨를. 가슴을. 허벅지를. 때밀이 타월로. 세게. 더 세게.
자국이 있는 곳을 문질렀다. 남자의 손이 닿았던 곳. 입술이 닿았던 곳. 그리고 — 안쪽. 그 감각이 남아 있는 곳.
안 지워졌다.
피부가 벌겋게 벗겨졌다. 피가 배어나왔다. 물과 섞여 발밑으로 흘러내렸다. 배수구로 분홍빛 물이 빨려 들어갔다.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 감각이 돌아올 것 같았다. 그 남자의 손이. 그리고 그때 느꼈던 것이.
10분. 20분.
타일 벽에 수증기가 빽빽하게 차올랐다. 거울이 완전히 흐려졌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수연아!"
지수가 달려왔다. 물을 껐다. 파이프가 딸깍 소리를 내며 멈췄다.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샤워기 아래 쭈그려 앉아 있었다. 타일 바닥이 차가웠다. 벗겨진 피부 위로 물이 흘러내렸다. 배수구 근처에 분홍빛 물이 고여 있었다.
"안 지워져."
지수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안 지워져."
대답할 수 없었다. 전부였다. 손. 입술. 안쪽의 감각. 그리고 — 그게 좋았다는 것. 그중 어느 것도 말로 할 수 없었다.
지수가 수건을 가져왔다. 나를 감쌌다. 부드러운 호텔 수건이었다. 벗겨진 피부가 쓰라렸다. 수건에 피가 조금 묻었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지수가 내 옆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욕실 바닥의 물이 서서히 배수구로 빠져나갔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수증기가 천천히 걷히면서 거울이 조금씩 맑아졌다.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윤곽이 수증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그날 밤,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커튼을 치지 않았다. 창밖에서 바다가 보였다. 달빛이 수면 위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끊이지 않는 소리. 아까까지 평화롭게 들리던 소리가 지금은 그냥 시끄러웠다.
지수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이불을 잡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돌아서서 안아줘야 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진실을 말해야 했다.
할 수 없었다.
어느 것도.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베개가 젖었다. 베개에서 호텔 세탁 냄새가 났다. 낯선 냄새. 낯선 침대. 낯선 몸. 낯선 나.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렸다. 엔진 소리가 기체를 울렸다. 이륙하는 순간 몸이 좌석에 눌렸다. 제주도가 작아지고 있었다. 해안선이, 현무암 돌담이, 귤나무 밭이, 그리고 어젯밤의 그 호텔이 — 전부 아래로 멀어져 갔다.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의 구름이 흘러갔다. 하얗고 두꺼운 구름. 끝없이 펼쳐진. 나는 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유리가 차가웠다.
팔걸이 사이로 지수의 손이 보였다.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주먹을 쥐고 있었다.
허벅지 안쪽이 아직도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