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내남편

그녀, 내남편(11) -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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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아파트 전체가 가라앉아 있었다. 위층에서도, 아래층에서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창밖의 도시는 불빛만 남기고 잠들어 있었다. 가로등이 커튼 사이로 희미한 줄무늬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수가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규칙적이고 느렸다. 이불이 어깨까지 올라와 있었고, 한쪽 손이 내가 누워 있던 자리를 향해 뻗어 있었다. 나만 잠들 수 없었다.

어제 일이 자꾸 떠올랐다.

엄마의 손이 내 등을 쓸어내리다가 멈추던 순간. 아버지가 끝내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것.

'죽는 것보단 낫지 않으냐.'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지수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을 옮겼다. 맨발이 차가운 마루에 닿았다.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갔다. 거실 창으로 도시의 불빛이 들어와 가구들의 윤곽을 희미하게 그리고 있었다. 소파에 앉았다. 쿠션이 눌리며 가죽이 삐걱거렸다.

허공에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푸르스름한 빛이 어둠 속에 너울거렸다. 얼굴 위로 파란 빛이 일렁였다.

[K-증권 인사팀: 김준우 과장 승진 발령 통지서]

3년 전이었다. 최연소 과장 승진. 아버지에게 전화했을 때 "그래, 역시 우리 아들이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밤 지수와 와인을 마시며 축하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홀로그램 빛이 손끝에서 흔들렸다.

삭제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삭제하시겠습니까?'

확인을 눌렀다. 데이터가 흩어져 사라졌다. 빛의 입자가 퍼지다가 꺼졌다. 거실이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다음 창. 다음 창. 하나씩 지웠다. 동창회 단톡방. 회사 메일. 피트니스 앱. 지울 때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 멈출 수 없었다. 어젯밤 서재에서 책을 버렸을 때처럼.

홀로그램의 빛이 거실 벽에 반사되었다. 창이 하나 사라질 때마다 벽 위의 빛이 줄어들었다.

마지막 파일 앞에서 손이 멈췄다.

[Wedding_photo_final.jpg]

열어보았다.

턱시도를 입은 내가 웃고 있었다. 옆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수.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넓은 어깨. 단단한 턱선. 지수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키. 배경에 하얀 장미 아치가 보였다. 햇살이 두 사람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두 사람 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홀로그램 속의 내가 웃고 있었다. 소파 위의 내가 울고 있었다.

천천히 손바닥으로 화면을 쓸어내려 닫았다. 삭제하지는 못했다.

모든 창을 닫았다. 거실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가구의 윤곽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냉장고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

"깼어?"

내 목소리가 푸석했다.

지수가 다가왔다. 잠옷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눌려 있었다. 소파 끝에 앉았다. 내 발끝과 지수의 무릎 사이에 쿠션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어제... 부모님 말씀 생각하고 있었어?"

"응."

고개를 끄덕였다.

"100억... 참 비현실적인 숫자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매니큐어가 가로등 빛에 아주 약하게 빛났다.

"밤새 생각해봤어. 돈도 없고, 성공률도 60%고, 뇌가 이미 변하고 있다고 했잖아."

숨을 쉬었다. 깊게. 가슴이 들렸다가 내려갔다.

"김준우가 다시 세상에 나올 확률은 0이야. 그걸 인정하고 나니까 — 오히려 발버둥이 멈추더라."

지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나를 묻어줘. 김준우를.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못하게."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묻는 게 아니야."

내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지수의 손이 따뜻했다. 내 손은 차가웠다.

"다시 태어나는 거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지수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름 생각해 놨어. 딸이 태어나면 주려고 했던 이름인데... 수연. 어때?"

수연.

"秀妍. 빼어날 수, 고울 연."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수연. 김수연. 혀끝에서 시작해 입술에서 끝나는 소리.

낯설었다.

"......수연."

입에서 새어 나왔다. 거실의 고요 속으로 퍼져나갔다.

지수가 미소 지었다. 웃는데 눈이 젖어 있었다.

"응. 수연아."

그렇게 불렸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잠옷 위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뭘 잃은 건지, 뭘 얻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 지수가 부른 그 이름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오래. 새벽의 정적 속에서 메아리치듯.


다음 날 오전.

지수는 오전 휴가를 냈고, 우리는 국가 통합 신원 센터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오가는 사람들. 출근길의 인파가 횡단보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버스가 지나갔다. 오토바이가 사이를 비집고 달렸다. 가게들이 셔터를 올리고 있었다.

두 달 만에 나온 바깥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소리가 이렇게 컸나. 택시 창을 통해서도 경적 소리와 공사장 소음이 들려왔다. 숨이 가빠졌다. 지수가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센터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유리 건물. 햇살이 건물 외벽에 반사되어 눈을 찔렀다. 입구 양쪽에 '국가 통합 신원 센터'라는 글자가 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자동문이 열릴 때 냉방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심호흡을 했다. 들어갔다.

로비는 넓고 밝았다.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가 울렸다. 힐이 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번호표 발급기 앞에 줄이 서 있었다. 천장이 높아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웅웅거리며 떠돌았다.

"생체 스캔 부스로 들어가 주세요."

지수를 돌아보았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명한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바깥 소리가 절반쯤 잘렸다. 부스 안은 좁았다. 양팔을 벌리면 벽에 닿을 정도.

붉은 레이저가 전신을 훑었다. 얼굴, 목, 가슴, 허리, 다리. 내 몸의 모든 곡선이 데이터로 변환되고 있었다. 빛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차가운 느낌은 없었는데 소름이 돋았다.

경고음.

부스 안에 붉은 빛이 깜빡였다.

"경고. 기존 식별 데이터(남성, 김준우)와 현재 생체 측정 값(여성, F-72형)의 매칭률 0%. 불일치로 인한 승인 거부."

경고음이 부스 밖으로까지 울렸다. 센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보았다.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던 사람들. 창구 직원들. 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까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개를 숙였다. 시선들이 피부 위에 닿는 것 같았다. 투명한 부스가 전시장의 유리 케이스처럼 느껴졌다.

지수가 내 앞으로 왔다. 부스 문을 열고 나를 가렸다. 단말기를 꺼내 칼릭스의 의료 증명서와 뇌 이식 수술 기록을 업로드했다. 침착하게. 손가락이 단말기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지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시스템이 데이터를 처리했다. 파란 막대가 천천히 차올랐다.

[데이터 갱신 및 신분증 발행 완료 — 성명: 김수연 / 성별: 여]

홀로그램 신분증이 허공에 떠올랐다. 내 얼굴. 김수연. 여. 사진 속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얼굴을 처음 본 날이 생각났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빛의 입자가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김수연.

"축하해, 수연아."

지수가 속삭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이제부터 나를 언니라고 불러."

지수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로비의 형광등 빛 아래서 그 눈물이 반짝거렸다.

"......응. 언니."

그 단어가 입에서 나왔을 때 —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센터를 나서자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밖은 환했다. 오전보다 바람이 따뜻해져 있었다. 센터 앞 화단에 노란 개나리가 피어 있었다. 벌 한 마리가 꽃 사이를 날아다녔다.

"나 이제 회사 들어가 봐야 해. 오전 휴가만 낸 거라..."

지수가 미안한 듯 말했다. 핸드백 끈을 고쳐 잡으며.

"괜찮아. 혼자 좀 걸어볼게."

"혼자서? 괜찮겠어?"

"적응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지수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혼자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평화로웠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사람들이 오가고 차들이 지나다녔다.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는 직장인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노인.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길고 가벼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손으로 귀 뒤로 넘겼다.

두 달 만의 바깥이었다.

걸을 때마다 모든 것이 달랐다. 보폭이 달랐다. 무게중심이 달랐다. 힐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보도블록의 이음새에 굽이 걸릴 뻔했다. 가방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호숫가 근처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보였다. 아이비가 벽면을 타고 올라간 이층짜리 건물. 테라스 좌석에 하얀 파라솔이 펼쳐져 있었다. 호수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두웠다. 바깥 햇살에 적응된 눈이 잠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나무 테이블과 캔들 조명이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이탈리아 팝이 작게 흘러나왔다. 점심 피크가 지나서 손님이 많지 않았다.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 한 잔 주세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주문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웨이터가 미소 지으며 메뉴를 받아 갔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 너머로 호수가 보였다. 수면 위에 버드나무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오리 몇 마리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와인이 나왔다. 잔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상큼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오래간만에 혼자 앉아서 마시는 술이었다.

그때 느꼈다.

시선.

테이블 두 개 건너에 앉은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서른 중반쯤. 정장 차림.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는 척했다. 시선이 사라지지 않았다. 창에 비친 반사로 알 수 있었다.

뺨이 뜨거워졌다.

예전에는 — 김준우였을 때는 — 다른 남자가 쳐다봐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당연하지. 남자니까.

지금은 달랐다. 시선이 피부 위에 얹히는 것 같았다. 등이, 목이, 어깨가 —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의식이 갔다.

파스타가 나왔다. 포크를 들었지만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를 바꿨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 나서 — 내가 왜 다리를 꼬았지?

심장이 빨라졌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손이 떨렸다. 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시선이 느껴졌다. 창가에 앉은 남자 둘이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한 명이 뭔가를 속삭이자 다른 한 명이 웃었다.

나를 보고 있다.

여자로 보고 있다.

싫어해야 하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몸 안쪽에서 열감이 올라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좁은 화장실이었다. 라벤더 방향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한 번, 두 번.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면대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타일 벽에 울렸다.

거울 속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 계산하고 나왔다. 문을 열자 바깥 햇살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집까지 걸어왔다.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 숨이 찼다. 힐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파트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이 사방에 붙어 있었다. 고개를 숙였다. 올라가는 동안 층수 표시만 바라보았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힐을 벗자 발이 아팠다. 발바닥에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거실을 지나 욕실로 갔다. 옷을 벗었다. 거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 아래 서 있었다.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등을 타고, 허리를 타고, 발끝까지. 욕실에 수증기가 차올랐다. 타일 벽이 뿌옇게 흐려졌다. 거울도 흐려졌다. 그게 좋았다.

레스토랑에서의 감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시선이 닿았던 곳 — 등, 목, 어깨. 그리고 그 시선에 반응했던 것. 다리를 꼬았던 것. 뺨이 달아올랐던 것.

좋았어.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 그 시선이 좋았다.

물줄기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뜨거운 물이 얼굴 위를 흘렀다. 눈물인지 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 몸이 무서웠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허락 없이, 반응하는 이 몸이.

그리고 그 반응을 싫어하지 못하는 내가.

물을 끄지 못하고 오래 서 있었다. 수증기가 욕실 전체를 가득 채웠다.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저녁. 지수가 돌아왔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 신발 벗는 소리. 가방 내려놓는 소리. 익숙한 일련의 소리들.

"수연아, 오늘 어땠어? 혼자 괜찮았어?"

"응."

소파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말리지 않아서 어깨가 축축했다. 텔레비전이 꺼진 채로 거실에 서 있었다. 검은 화면에 내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밥은?"

"파스타 먹었어. 호숫가 레스토랑에서."

"혼자? 잘했네."

지수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입만.

지수가 부엌으로 갔다. 수도꼭지 트는 소리. 컵에 물 따르는 소리. 의자를 끌고 앉는 소리. 그 사이 나는 젖은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떤 단어로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언니."

"응?"

"우리... 어디 좀 다녀올까. 여행. 며칠만이라도."

지수가 부엌에서 나와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읽으려는 것 같았다. 내 젖은 머리카락을, 맨 얼굴을, 구부린 어깨를 보았다.

"제주도 어때? 바다 보면서 며칠 쉬자."

"......응. 가고 싶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아파트에서. 이 거울들에서. 그리고 — 오늘 알게 된 것에서.

창밖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거실에 주황빛이 번졌다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